습작 노트

노트 찾아 삼만리, 점점 예민해지는 감성

매일매일 글을 쓰기로 마음먹고 사용하지 않는 노트를 찾았다. 시작도 하기 전에 풀 세팅하는 어리석은 일은 더 이상 하지 않는다. 아니나 다를까 책장을 뒤지니 빨간색, 검은색 노트가 하나씩 나온다. 안의 내용들을 유추해 보건대 적어도 5년 전에 산 노트다. 업무용 메모장으로 쓰다가, 아들의 재미있는 말을 적고, 책 내용을 기록하는 등 어떻게든 버리지 않고 써 보려 노력한 흔적이 남아 있다.


그 노트 두 권의 스프링을 풀어 필요 없는 페이지는 버리고, 새 종이들을 검은 표지에 넘겨 묶었다. 보관해얄 것 같은 메모는 빨간 스프링노트로 보냈다. 빨간 노트는 납작해졌고, 검은 스프링 노트는 두툼해져 130장 260페이지의 공책으로 재탄생했다. 검은 노트의 표지 글자가 자꾸 눈에 거슬리는 게 싫어, 내가 좋아하는 샛노란색을 동그랗게 오려 붙였다. 동그라미는 당찬 눈빛을 하고 있어 마음에 든다.


창의성을 나타내는 노랑. 노트를 꺼내 책상 위에 놓을 때마다 노란 버튼을 누르고 이상한 나라로 들어가는 폴이 떠오른다. 샛노란 스티커가 붙어 있는 까만 노트를 책상 위에 올려놓는 것은 일종의 잠금 해제 장치로, 내 머리와 마음의 빗장을 연다. 만년필을 골라 들고, 천천히 뚜껑을 돌리면 준비가 다 됐다. 새파란 잉크는 점점 더 깊은 심해로 들어가 이야기를 낚아 올린다.


다행히 이 종이는 만년필로 써도 잉크가 배지 않고, 볼펜으로 써도 필기감이 괜찮다. 8mm의 간격은 나중에 눈이 침침할 때도 읽을 수 있을 만큼 크고 씩씩한 글씨를 쓸 수 있다. 노트는 쓰면 쓸수록 나무랄 데 없었다. 차곡차곡 쌓이는 페이지의 양감도 마음에 들었다. 물성에서 오는 만족감은 오랜만이다. 사람 손이 자주 지나 간 종이장은 부드럽게 닳아 도르륵 넘어간다. 부드러운 낱장의 느낌이 성실하다.


검은 노트를 다 쓰고도 마음에 들어, 똑같은 노트를 써야겠다 생각했다. 이번엔 더 두툼하게 두 권을 통째로 묶어 대학노트처럼 두껍게 만들었다. 연습하는 글을 쓸 때는 만년필 여러 개 놓고, 입맛대로 고른다. 훌륭한 작가님들은 손을 이용해 종이 위에 적으라고 하신다. 나도 만년필로 종이 위에 쓰는 글이 좋다. 자판을 두들기면 깊은 곳의 뇌세포가 움직이는 게 아니라, 입과 가까운 어느 부분의 뇌가 움직이며 가벼운 말을 쏟아낸다.


컴퓨터로 작업할 때는 앞부분부터 지금 작업하는 문장까지 한 화면에 보이니, 자꾸 수정을 하게 되어 시간이 더 걸린다. 종이에 적을 때는 분량을 정해 놓고, 그저 쭉쭉 써 내려간다. 정해진 시간 안에 정해진 분량을 처리하는 훈련이 된다. 만약 컴퓨터로 작업을 하려면 더 엄격하게 분량을 채우는 훈련이 필요할 것 같다. 아무리 그렇다 해도 물리적인 만족감은 덜 할 것 같다. 하루하루의 내 노력이 쌓인 손때 묻은 노트는 보이지 않을 테니까.


스누피의 아버지 찰스 M. 슐츠는 아이 셋을 직접 케어하며, 조수도 없이 50년 동안 매일 만화를 그렸다고 했다. 그 결과물은 샌프란시스코에 있는 스누피 박물관에 있다. 그 정도는 아니어도 매일매일 기록하는 데이터가 쌓이다 보니, 나도 별도의 관리가 필요해졌다. 노트를 모두 외울 수도 없는 일이고, 컴퓨터에 옮기 자니 이것도 시간이 걸리는 일이다. 컴퓨터로 파일을 각각 만들자니 텍스트가 검색이 안 되고, 파일 한 개에 모두 넣자니 제목이 한 번에 안 보인다.


그렇다면 노트를 바인더에 끼울 수 있는 걸로 바꿔보자 생각했다. 마음대로 쓴 글을 주제별로 바인더에 정리하면 금방 여러 권의 책이 될 것 같은 욕심이 생긴다. 타공이 되어 있는 종이에 낱장으로 써서 바인더에 철하려니, 구멍의 깊이가 밭아 종이가 금방 찢어질 것 같다. 노트보다 큰 A4용지를 구입해 글을 쓰는데, 이런. 이 종이는 만년필이 배어 나온다. 어쩌면 좋지. 벌써 네 권이나 샀는데. 그래도 잉크가 배어 글씨가 어지럽게 읽히는 이 종이를 쓸 수는 없다. 수고스럽지만 구멍이 없는 종이에 써서 펀치로 타공해 꽂아얄 것 같다. 안 되겠다.


그럼 지금 쓰는 노트가 좋은데, 이 노트를 끼울 수 있는 바인더는 있나 싶어 찾았더니 그런 제품은 없다. 그럼 29공 바인더에 노트가 철해진 제품을 써 보자 하고 주문했다. 비닐 바인더에 먼지가 붙는 천박함이 고민할 필요도 없이 싫다. 글을 정리하려면 자그마치 구멍 29개에 맞춰야 하는 수고스러움도 싫고, 노트를 펴 놓고 글을 쓰기 힘들 것 같다. 180도 펴지지 않으니 한 장을 꺼내 글을 쓰고, 다 쓴 후 29개의 홀에 맞추는 수고를 해야 한다. 생각이 흐르지 않고 29번 막힌다. 나는 이 바인더 노트를 2권 샀고, 내지는 2권 더 샀다.


A4용지에 라인을 출력해 쓸까 했는데, 만년필이 서걱거린다. 프린팅에 적합한 용지이지 만년필에 알맞지 않다. 데이터가 쌓이는 것은 반가운 일이지만, 관리법을 찾지 못해 나의 소중한 글들이 제대로 관리가 되지 않을까 조바심이 난다. 생각해 보니, 이제 겨우 두 권째의 습작 노트다. 여전히 허공에 울리는 깽깽이 소리와 다를 바 없다. 시끄럽기만 하지 아름답진 않을 텐데. 나에게만 소중한 노트일 뿐.


정 없으면 A4 3공 내지를 구입해 구명이 뚫려 있지 않은 면에 타공해 뒤집어써야겠다. 지금까지 떠오른 아이디어 중에는 가장 좋으나, 아무래도 타공 된 구멍이 영 보기 싫을 것 같아 망설여진다. 결국 포기하고, 뜯어 쓰는 리포트 용지를 사 왔다. 하얀색이라 무난하게 쓸 거라 생각했는데, 3일 차까지 쓰는데도 영 냉소적인 자아가 자꾸 흘러나온다. 종이에서 느껴지는 차가운 느낌 때문일까. 도저히 안 되겠다.


오늘은 A4 스프링 노트를 찾았다. 7.5mm 칸에 다 쓰면 노트를 뜯는 절취선이 있다. 타공이 되어 있지 않아 적당한 간격으로 3공 펀치를 써서 종이가 쉽게 뜯어지지 않도록 마감할 수 있다. 제일 마음에 든다. 며칠 써 보고, 내 감성 자아가 어떤 글을 써 줄지를 지켜본 후 결정해야겠다. 노트를 네 번이나 사다니. 오감이 더욱 예민해진다. 작가로서는 반가운 일이지만, 생활인으로서는 점점 더 피곤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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