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순하고, 풍요롭고, 자비로운 소울 푸드
고기를 끊은 지 다섯 달 정도 되어가네요. 해산물은 먹지만, 매일 그 비싼 해산물만 먹고살 수는 없잖아요. 태국이니까 한국보다야 저렴하겠지만, 해산물은 어느 나라나 비싸죠. 저렴하고 만만한 건 쌀국수 정도죠. 쌀국수는 보통 고기로 육수를 내니까, 발길을 끊게 되더라고요. 가끔 해산물 쌀국수를 찾아서 먹는 정도고요. 사람 일 몰라요. 쌀국수가 없었다면, 태국을 이렇게나 좋아했을까 싶거든요. 베트남도 마찬가지고요. 쌀국수 최강인 이 두 나라를 저는 특히나 사랑해요. 한 끼에 쌀국수를 두 그릇씩 먹었던 사람이, 쌀국수를 끊었어요. 고기가 안 들어간 음식을 찾다 보니, 식당 선택의 폭이 급격히 좁아지더군요. 이것저것 신경 쓰느니 집에서 해 먹자. 한동안 요리에 심취했더랬죠. 이 더운 나라에서 음식 해 먹다가는, 열사병이라도 걸릴 것 같아요. 주방에는 에어컨이 없다 보니까, 프라이팬에 뭐 볶고, 설거지까지 끝내고 나면 땀범벅이에요. 요리 한 번에 샤워는 필수예요. 이것도 하루 이틀이지, 먹고살겠다고 지나치게 힘을 뺀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죽으라는 법은 없는지, 삶아놓은 쌀국수가 눈에 띄더라고요. 삶아놓은 쌀국수를 시장이나, 마트 어디에서나 쉽게 살 수 있어요. 따로 조리가 필요 없어요. 한국에서는 찾으려고 해도 찾을 수도 없는 아이템이죠. 소면을 끓이는 절차가 전혀 필요 없어요. 불을 사용하지 않고, 국수를 먹을 수 있는 나라가 태국 말고 또 있을까요? 역류성 식도염까지 달고 살아서 밀가루 음식이 쥐약이거든요. 이 소중한 쌀면 때문에라도, 저는 태국 아니면 못 살아요.
비빔국수 다들 좋아하시죠? 핵심 재료는 간장, 참기름, 설탕, 식초 정도죠. 여기에 고추장을 추가해도 되고요. 김가루를 뿌리면 더 좋고요. 얼마나 넣어야 하냐고요? 그건 저에게 묻지 마세요. 인터넷에, 유튜브에 널린 게 비빔국수 레시피니까요. 저는 계량 같은 건 몰라요. 대충 이 정도다 싶게 감으로 넣어요. 허전하다 싶으면 설탕, 허전하다 싶으면 간장 이런 식으로 간을 맞추죠. 간장 비빔국수엔 고춧가루가 아주 잘 어울려요. 요리를 하면서 고춧가루가 훌륭한 향신료라는 걸 깨닫게 됐어요. 간장 비빔국수에서 고춧가루는, 아주 유쾌한 한 방이에요. 비빔국수의 대단한 점이 뭔지 아세요? 망칠 수가 없다는 거예요. 간장을 쏟으셨나요? 괜찮아요. 물을 부으세요. 그게 무슨 비빔국수냐고요? 비빔국수는 아니지만, 맛에는 전혀 타격을 주지 못해요. 뭔가가 과하게 들어갔다 싶으면, 냉수를 넣어가며 간을 맞추세요. 그 국물조차 얼마나 맛있는데요.
비빔국수가 맛있는 이유는 참기름 때문이죠. 저처럼 얄팍한 미식가는, 참기름의 폭력에 가까운 일방적인 향이 미친 듯이 좋네요. 식초와 참기름의 극단적 대립은, 혀와 코를 요동치게 해요. 김가루 역시, 비빔국수의 맛을 0.5단계 정도 올려 줘요. 단순한 요리인데, 짠맛, 단맛, 신만, 기름진 맛이 양보 없이 치솟고, 고꾸라지면서 소동극 한 편을 본 것처럼 얼얼해져요. 태국에서 김치도 팔아요. 한국산은 당연히 비싸죠. 태국 김치는 식초까지 넣더군요. 근본 없는 김치라서 익은 맛을 식초로 내더군요. 저렴하기도 하지만, 이게 또 비빔국수의 끝내주는 재료가 돼요. 그걸 통째로 갈면, 삼청동 김치말이 국수 싸다구 갈기는 맛이 나요. 참기름과 김가루 정도는 추가해 줘야죠. 김치의 원래 식감을 선호한다면, 그냥 넣어도 돼요. 냉수로 간을 조절하면서요.
이렇게 맛있는 요리가, 단 3분이면 끝나요. 시간 절약, 돈 절약에 취향까지 저격하는 음식이 비빔국수 말고 또 있을까요? 솔직히 제가 만들었고, 누구나 만들 수 있지만 줄 서서 먹는 맛이라고 자부합니다. 그러니까 비빔국수 열심히 만들어 드시라고요. 그런데 저는 한국 가면, 못해 먹을 것 같아요. 면을 삶는 게, 너무나 억울해요. 태국에서 쉽게 해 먹다 보니, 면 삶는 것 자체가 가혹한 노동처럼 여겨져요. 쌀국수에 빠져, 태국에 머물게 된 저란 사람은 이젠 비빔국수 때문에 태국 못 떠나겠어요. 이렇게 훌륭한 나라를, 많은 사람들이 몰랐으면 좋겠어요. 독점하는 즐거움에 빠져 살고 싶네요. 그런데 왜 구구절절 쓰고 있냐고요? 비빔국수에 대한 감사함을 꼭 전하고 싶었거든요. 너 때문에 내가 산다. 수줍은 사랑 고백은 한 번쯤 해야겠더라고요. 도리를 아는 인간이라면요.
PS 매일 글을 씁니다. 행복을 꿈꾸기보다는, 모든 순간을 받아들이는 사람이고 싶어요. 이 삶의 너머를 우리가 모른다면, 지금의 모든 순간을 절대적으로 믿고, 휘둘리고 싶지도 않아요. 모르는 걸 모른다고 할 수 있는 용기, 그 용기를 탐내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