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신여대 옥상에서 우린 모두가 기적, 반짝반짝
이상하다. 왜 졸리지가 않지?
-군산에서 세 시간 반 잤다. 더워서 깼더니 깜깜한 새벽. 에어컨을 다시 켜고는 이리 뒤척, 더리 뒤척. 말똥말똥. 이상하다. 잠이 안 온다. 군산 KDB 생명에서 강연을 마치고 고속버스. 서울까지 두 시간 반. 푹 자자. 또 잠이 안 온다. 버스에서 잠이 안 오다니. 처음 있는 일이다. 각성제를 먹었나? 뇌가 뻣뻣해진 느낌이다. 일기를 써야 한다. 일기를 써야 해. 뻣뻣해진 뇌는 같은 말만 주절댄다. 일곱 시 반에 시작되는 모임. 장소는 성신여대. 유경이가 사는 곳. 1층은 파스타 집. 일기부터 끝내야 한다. 두 시간이 남았다. 옆 건물 카페로 간다. 자몽 에이드를 시키고, 노트북을 편다. 일기를 써야 해. 매일 쓴다는 약속 때문에 쓴다. 누구와의 약속이지? 나와의 약속이다. 바람직하지 않다. 철철 넘치는 글이어야지. 쫓기는 공포에 질려서 쓴다. 일곱 시 반. 늦으면 안 된다. 나를 보러 온 사람들. 왜, 졸리지가 않지? 정말 이상해. 잠을 좀 잤어야지. 그래야 생기발랄하게 떠들지.
아, 끝냈다.
오타가 많을 거야. 끝을 내는 게 중요하다. 뇌 여러 곳에 실핀이 오돌토돌 박힌 상상을 한다. 오늘은 가장 많은 사람이 모인 자리. 두렵다. 두려움이어서는 안 된다. 즐거움이어야 한다. 그런데 두렵다. 아니, 왜 하필 밤, 왜 하필 옥상이야. 까맣게 탄 내 얼굴은, 옥상에서 더욱 찌들고, 까매질 것이다. 일곱 시 삼십오 분. 파스타 집으로 간다. 유경이는? 오늘의 파티를 주선한 유경이는? 유경이는 없다. 대신 2층에선 페루에서 온 두 명의 아가씨가 음식을 준비한다. 잠깐 헷갈린다. 1층은 식당, 2층에서 또 음식. 잠깐, 잠깐. 이미 알고 있는 사실. 1층에서 저녁을 먹고, 2층에서 티타임, 3층에서 강연. 당황하는 이유는 유경이가 없다는 것. 그리고 1층이 이미 바쁜 식당이라는 것. 성신여대에서 제일 장사가 잘 되는 파스타 집인가? 나를 보러 온 사람들도, 그냥 온 손님들도 섞여서 밥을 주문한다. 혼자 온 손님들이 보인다. 소외감을 느껴선 안 된다. 나라도 이 분위기를 이끌어야지. 나의 오랜 독자들도 보인다. 모임 때마다 와 주는 사람들. 늘 고맙지만, 좀 소홀하다. 이해해 줄 걸 아니까. 모르는 이들에게, 나를 처음 본 이들에게 다가간다. 최고의 영업 사원이 되어 발랄하게 떠든다. 낮에 먹은 군산 안젤라 떡볶이가 명치에 머물고 있다. 답답하고, 고통스럽다. 내가 책임져야 할 분위기. 몰입의 순간은 그 어떤 감정도 없다. 좋다라든지, 싫다라든지. 이 모든 사람들이 행복했으면 좋겠다.
-손님이 갑자기 많아져서요. 좀 띄엄띄엄 올 줄 알았는데...
파스타 집 사장 역시 당황한다. 내가 메뉴판을 들고 주문을 받는다.
-9시 30분부터 강연 아닌가요?
그런가? 참석자들이 대충 식사를 마쳤다. 한숨 돌리고, 리소토를 먹는다. 오랜 독자이자, 큰 도움을 여러 번 준 한의원 원장이 약 봉투를 건넨다. 알약과 가루약. 가루약은 따뜻한 물에 탄다. 먹었더니 속이 편하다. 신기하다. 나는 이렇게 존재한다. 이래서 존재한다. 이제는 떠들어야 한다. 이들은 먹으러 온 게 아니야. 나를 보러 온 거야. 내 이야기를 들으러 온 거야. 몇몇은 며칠 전 모임에서도 봤다. 그들에겐 같은 이야기면 안 된다. 내가 용납을 못 하겠다. 모두에게 새로운 이야기여야 한다.
-아니, 왜 이렇게 말랐어요?
여기저기서 걱정의 말들. 나, 진짜 이렇게 말라가다가 죽는 걸까? 여러 번 들어도, 여러 번 철렁한다. 남들의 시선, 극도의 피로, 유경이는 어디 있지? 강연장은 옥상. 텐트가 있고, 스크린이 펼쳐져 있고, 노트북에선 하바나 나나나. 여름의 끝. 따뜻하고, 청량한 두 개의 바람. 나는 침을 삼킨다. 옹기종기 모인 서른 명의 손님을 향해 입을 연다.
-서로 어색할 때요. 어떻게 시작해야 하죠? 모르는 분들과 인사부터 할래요?
이런 말이 왜 나오는 걸까? 내 입은 늘 반전을 준비한다. 서로가 인사를 나눈다. 약간의 웃음소리.
-저는 여행자고요. 대비하지 않는 삶을 살아요. 대비가 불가능하다고 생각해서요. 최소한의 돈으로 다니고, 써요.
이제는 어쩔 수가 없다. 나는 벼랑 끝에 몰려서 부드럽게 입수한다. 풍덩, 수영을 시직 한다. 물에 들어오기 전까지만 문제일 뿐. 이제부터 물놀이다. 나의 힘은 그 어느 때보다 세다. 최고의 내가 된다. 내 입에서 나오는 말들은 극도로 다듬어졌다. 허툰 말은 하나도 없다. 꼭 해야 할 말들로, 돈암동 옥상을 쩌렁쩌렁 울린다. 내가 화자이고, 내가 청자다. 청자가 되어, 내가 한 말들에 하나씩 감탄한다. 정말 이상한 날이다. 이 먼 곳에서 무슨 대단한 이야기를 듣겠다고, 여기까지 왔을까? 부산, 대구, 대전, 헤이리, 인천, 서울 사람들에 둘러싸여서는 기가 막힌 연주를 한다. 나의 혀와 목울대, 각성한 뇌와 두 개의 바람, 그리고 60 개의 눈동자. 유경이가 술과 등갈비, 나초와 샐러드, 상그리아와 칵테일로 가득한 테이블을 들고 온다. 돈가스집 사장이기도 한 유경이는 매장 일을 끝내고, 아래층에서 이 많은 음식을 뚝딱 해왔다. 나의 신들린 몰입이 끝나고, 여전히 내가 놀랍다. 피곤하지 않고, 두렵지 않다. 두근거리고, 또 안도한다. 어마어마한 해피엔딩이다. 이제 각자의 시간. 새벽 네 시까지 마신다. 내가 마신다. 내가 남아서 그들 속에서 마시고, 떠든다. 고장 나기 전 최고조의 몸이 된다. 곧 고장 날 것이다. 곧 앓아누울 것이다. 이 신비로움을 어쩌지? 이게 기적이란 건 아마 나만 알 것이다. 말도 안 되는 밤이다. 말도 안 되게 황홀한 밤. 나는 나를 다 썼다.
PS 유경이는 이미 지인들을 통해 세팅을 끝내 놓은 상태더라고요. 처음의 혼잡은 식당에 손님이 몰리면서 일어난 잠깐의 무질서였어요. 유경이는 밤늦게까지 식당 일을 하고, 이런 어마어마한 파티까지 끝냈어요. 중계동에 정수제 돈까스. 꼭 한 번 가보세요. 전주에는 여러 지점이 성업 중이고요. 전국구 돈가스집이 될 겁니다. 1인당 3만 5천 원을 받아서요. 1층에서 만 오천 원 식사를 대접하고요. 2층에서 마카롱과 티타임, 3층에서 엄청난 술과 최고급 안주. 그리고 큰돈을 제게 강의료로 줘요. 누군가의 완벽한 희생이 있어야 가능한 밤이죠. 저는 평생 여행하고, 평생 다가가야 할 사람입니다. 이제, 잠 좀 자야겠어요.
PS 매일 일기를 써요. 저만의 오체투지 방식입니다. 왜 쓸까요? 가끔은 저도 잘 모르겠어요. 이게 지구 끝까지 닿는 작은 한 걸음이란 생각으로 써요. 동네 도서관에 박민우의 책이 없다면 추천해 주실래요? 더 많은 이들에게 읽혀야죠. 제 책이 좀 좋은 책이어야 말이죠. 2019년은 '입 짧은 여행작가의 방콕 한 끼'란 책을 홍보 중이고요. 방콕 여행을 준비하신다면 최고의 책이 될 거예요. 진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