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에 입양이 소원이었던 아이
공항에서 우린 몇 번이나 눈이 마주쳤다. 맞나? 아니야, 맞나? 서로를 몇 번씩 분석하고는 내가 먼저 알아봤다. 선생님은 모자를 썼다.
아니 왜 이렇게 말랐어? 다른 사람인 줄 알았잖아!
말랐다는 소리, 20년간 들었던 소리다. 다른 사람인 줄 알았잖아. 처음 듣는 소리다. 세계 테마 기행으로 보르네오 섬을 다녀온 후엔 붉은 가면을 썼다. 얼굴 정면과 귀 옆 살색이 확연히 다르다. 붉은 가면이 저주처럼 달라붙었다. 마르고, 새까맣고, 두 가지 얼굴색으로 얼룩져있다. 선생님은 여든이 가까웠는데도 여전하시다.
-롱아일랜드까지는 얼마나 걸리나요?
-두 시간 좀 안 걸려요.
선생님은 말을 안 놓으신다. 말을 놓으세요. 스무 번 정도는 했다. 폭우가 내려서, 길이 많이 막혔다고 한다. 공항과 고속도로는 국적이 없다. 다 똑같이 생겼다. 연로하신 분이 직접 마중까지 나왔는데, 나는 왜 이리 덤덤할까? 굉장히 반가워해야 한다는 강박감에 괴롭다. 혀를 입천장에 대고 입을 힘껏 벌린다. 왼쪽 턱이 우지끈. 더, 더 크게 벌린다. 아직 멀었다. 생각날 때마다 ‘몽크’가 되어야 한다. 누군가가 나를 쫓아다니며 다큐멘터리를 찍어줬으면 한다. JFK공항에서 롱아일랜드로 향하는 혼다 SUV 조수석에서 타원형으로 입을 오므리고 무소음의 비명을 질러댄다. 사모님도 건강하시죠? 건강해 보이세요. 꿈만 같아요. 미국의 나무들은 정말 크네요. 이런 말을 가끔 섞다가, 창밖으로 고개를 돌리고, 절규.
왜 이렇게 말랐어
신경 안 쓰고 싶은데, 이 말만 남는다. 멸치처럼 새까맣게 말라서는, 누굴 만난다는 거야? 납치되는 기분이다. ‘노 메이크업으로 남편의 옛 여자 친구를 만나러 롯데백화점으로 납치되는 마누라 모임’ 회장은 내 마음을 알 것이다. 한국 시간으로 새벽 네 시. 졸리지는 않고, 그저 내가 너무 못생겼다. 어허, 그대로구만. 빈말이라도 해주시지. 공항에서 선생님은 진심으로 나를 뚫어져라 봤다. 다른 사람이야. 확신하면서…. 사모님도 나를 몰라볼 거야. 딱 한 만 봤을 뿐이다.
여기가 제퍼슨 항구예요.
롱아일랜드 제퍼슨 항구. 세 단어 중에 항구만 익숙한 단어. 한국에선 볼 수 없는 항구다. 하얀 요트가 선착장에 뒤뚱뒤뚱. 부자 냄새가 난다. 제퍼슨 항구, 주택가, 골프장을 천천히 돌았다. 선생님은 내가 좋아할 만한 곳으로 일부러 돌고 계신다. 미국 영화에서 나올 법한 이상적인 주택가가 이어진다. 이런 곳에 내가 오다니. 꿈만 같다. 기대 이상으로 멋진 풍경이다. 아름답다고 다 감동할 필요는 없다. 나는 못생겼다.
오느라고 고생 많았어요. 박 작가님 온다고 미용실까지 다녀왔어요. 호호
누구나 나를 보면, 외모 이야기부터 한다. 실제로 보니까 블라블라. 사모님은 아무 말씀이 없으시다. 몹시 불안하다. 하얀 머리카락이 꼬불꼬불, 드문드문. 파마가 의미 없는 머리숱. 피부가 뽀얀 사모님은, 굵고 진한 속눈썹까지 붙이셨다. 젊었을 때의 미모가 남아있다. 나이를 먹으면 자유로워진다? 새빨간 거짓말. 원래 자유로웠던 사람이 늙었던 거지. 얽매인 사람은 끝까지 얽매인다. 여든이 된 내 모습을 사모님에게서 본다. 저온으로 오래 볶은 참기름 두 병, 오설록 전통 차 두 박스, 발거스 본을 트렁크에서 꺼냈다. 발거스본? 발가락에 끼우는 척추 교정기다. 발가락 사이사이에 고무로 된 검은 물체를 끼워 넣는다. 자세가 교정되고, 다리가 안 붓는다고 인터넷에서 난리다. 물론 나도 쓰고 있다. 액체괴물처럼 생긴 물건을 여든의 노인에게 가져올 땐 고민이 많았다. 평소 무릎이 안 좋다는 사모님에게, 작은 기적이고 싶었다. 일단 나의 x자형 다리가 꽤 반듯해졌다. 어머니도 내 팔자걸음이 좋아졌다고 놀라셨다. 무릎이 안 좋은 사람에게도 효과가 있지 않을까? 설마 했다가, 신통방통하다며 기뻐하시는 모습을 상상했다. 어떻게 안 사 올 수가 있을까?
“아이고, 뭘 이런 걸 사 오고 그래요. 안 사 와도 밥 줘요. 호호호. 그런데 제가 약을 먹고 있어서 차는 못 마셔요. 참 기름은 잘 쓸게요. 아휴, 이런 걸 무겁게, 뭐 하러.”
고추장찌개와 김, 오이지, 깻잎 장아찌가 있는 밥상. 고추장찌개가 달달하다. 오설록 차는 실패, 참기름은 성공, 발거스 본은?
“제가 답답한 걸 못 참아요. 꼭 필요한 사람 있으면 줘도 되죠?”
발거스 본도 실패
“책에서 볼 땐 굉장히 서글서글해 보이는데, 날카로우세요.”
드디어 나왔다. 내 몰골에 대한 반응. 내 얼굴도 실패. 날카롭다는 단어에서 빈티, 못 생김을 번역해냈다.
“화장실이 세 개니까요. 여기 이거 편하게 혼자 쓰세요. 휴지는 변기가 막혀서요. 괜찮아요. 그냥 휴지통에 버리시면 돼요.”
똥 휴지는 휴지통에 쌓을 것.
“수면제 드시고 잘래요? 이거 잘 들어요. 미국에서 보험 돼서 싸요. 절대 안 해로워요. 이거 드시고 주무세요.”
사모님은 수면제를 드신다. 예민하신 분.
내게 배정된 방은 지하방이었다. 특이한 구조의 3층 집인데 사모님 내외는 2층 방을 쓰신다. 지하에 있지만 아늑한 방이다. 근사한 테이블이 따로 있다. 커피를 마시며 글을 쓰기엔 딱이다. 선생님 내외가 쓰시는 방 옆방이 아니다. 감사합니다. 수면제를 먹고 눈을 붙였다. 새벽 세 시에 눈이 떠졌다. 소변이 마려웠다. 기다란 직사각형 가장 안쪽에 꼭 붙어있는 침대에서 일어나 책상 위 랜턴을 들었다. 랜턴을 켜고, 긴 방을 천천히 걷는다. 세탁실과 술, 식재료가 쌓인 창고를 지나 계단을 밟는다. 조심, 조심 걷는데도 삐걱거린다. 나만의 단독 욕실 문을 연다. 단독 욕실은 부부 침실과 대각선이다. 방문을 열고 주무신다. 조심, 조심 여는데도 삐걱, 삐걱. 불을 켠다. 윙윙. 환풍기 소음이 심하다. 전등을 끈다. 칠흑처럼 어둡다. 랜턴을 켜고, 변기에 앉아서, 소변을 조금씩 나눠서 내보낸다. 일단 시차에 적응해야 한다. 모호하고, 불편한 감정은 시차 적응을 하지 못해서다. 어릴 적 꿈이 미국 입양아였다. 미국인 양아버지, 양어머니랑 매일 스테이크와 아이스크림을 먹고 싶었다. 미아리 단칸방 전세살이 부모님을 부끄러워했다. 미국은 치즈와 소시지, 아이스크림이 냉장고에 가득한 나라. 양어머니에게 사랑받아야 한다. 입양 첫날, 한 아이가 필사적으로 고요하게 소변을 누고 있다.
PS 매일 글을 씁니다. 세상 끝까지 닿는 글쟁이가 되고 싶어서요. 작은 오체투지라 여겨 주세요. 천천히 다가가겠습니다. 가까운 도서관, 학교, 군부대에 박민우의 책들을 신청해 주세요. 2019년은 '입 짧은 여행작가의 방콕 한 끼'를 홍보 중입니다. 9년간 방콕에 머물면서 애정을 품게 된 단골집, 카페 그리고 태국 음식 이야기를 담았어요. 재미나게 읽어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