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렌지 빌리지 호스텔의 아침 식사는 7시부터다. 보통 6시면 눈이 떠진다. 6시 30분부터, 7시가 아직도 아니라는 사실이 불편해진다. 7시는 왜 꼭 7시가 되어야 7 시인 걸까? 새벽에 깨어나서 소변을 꼭 한 번 본다. 남보다 방광이 작다. 그래서인지 깊은 잠을 못 잔다. 아침에 저절로 눈이 떠진다. 주방에선 필리핀 직원 두 명이 분주하다. 커피를 끓이고, 주방 바닥을 닦는다. 시리얼 통에 시리얼을 가득 붓고, 와플 반죽도 채워 놓는다. 나는 그 누구보다 일찍 주방 겸 식당에서 첫 커피와 첫 식빵을 담는다. 향은 커피인데, 자동차 폐타이어 맛이 나는 신비로운 커피다. 일단 너무 진하다. 식빵에 누뗄라를 듬뿍 바르고, 커피를 따른다. 요구르트는 있는 날도 있고, 없는 날도 있다. 오늘은 없다. 와플, 바나나는 외면한다. 시리얼 약간에 우유. 예전에는 공짜니까 많이 먹고 봤다. 허기가 두려워서, 많이 먹어두려는 것이다. 이젠 소화도 예전만 못하고, 두려움도 예전만 못하다. 두려움의 비율이 줄어들고 있다. 방향성은 마음에 든다.
“어제 여기 때문에 하루를 공쳤잖아. 오늘은 좀 제대로 하자.”
식당에서 한국 부부가 말다툼 중이다. 탁자에는 인스턴트 육개장 국밥이 보인다. 남편이 짜증을 내고, 아내가 풀이 죽은 얼굴로 가이드북을 펼친다. 큰마음먹고 자유여행에 도전한 부부인듯했다. 말은 안 통하고, 보기로 한 것 중 절반을 못 봤다. 돈은 돈대로 쓰고 이게 뭐 하는 짓이야? 오늘은 실수 없이 제대로 하자, 응? 금문교를 가고, 게살 수프를 먹어야 한다. 전차를 타고 롬바르드 길에서 인생 사진을 찍고, 짠내 투어에 나왔다는 마마스에서 브런치도 먹어야 한다. 그들의 하루는 촉박하고, 나는 하루는 백지다. 여행까지 와서 저렇게 쫓겨야 해? 나는 잠시 그들을 비웃는다. 그리고 반성한다. 내가 틀렸다. 시간의 가치는 그들이 옳다. 외나무다리를 건너듯, 십 분, 십 분을 내딛는다. 다급함 속으로 빨려 드는 풍경을 질투한다. 행복하고자 안달 난 사람. 그들의 하루는 누구보다 소중하다.
2
“수고하셨습니다.”
몽유병인가? 침대에서 누군가가 벌떡 일어난다. 나름 조심해서 문을 열었다. 누워 있던 한 남자가 벌떡 일어나더니 수고하셨습니다. 우렁차다. 그래 수고하면서 문 열기는 했지. 나는 ‘수고한’ 남자가 됐다.
“아, 안녕하세요.”
몽유병 환자가 머리를 긁적인다. 아래층 침대에서 누군가가 킥킥댄다. 두 명의 한국인이 새로 들어왔다. 둘은 소방관이다. 갓 제대한 군인 한 명에, 두 명의 소방관. 나만 빠지면 자연스럽게 군대 내무반이다. 이야기꽃을 피우다가 맥주를 사 와서 마실 테지. 그게 진짜 여행이지. 과거의 내 여행은 그랬다. 이제는 아니다. 이들과 어울릴 수 없다. 얘네들 사줄 술값이 일단 없다. 더치 페이를 하기엔 너무 염치없이 늙었다. 그렇다고 나 때문에 분위기가 처졌다고는 생각 않겠다. 정엽이는 술을 안 마실뿐더러, 아홉 시면 잠이 드는 아기다. 이런저런 이유로 고립된 여행을 한다. 카즈마가 보고 싶다. 남미와 아시아를 동행했던 카즈마는 지금 오사카에서 가구업을 한다. 가구를 만드는 건 아니고, 친구가 만든 가구를 파는 일종의 사무직이다. 매일 유튜브나 본다며 내게 자랑했다. 이제 아장아장 아들까지 있는 카즈마는, 나와 함께라면 언제라도 짐을 쌀 녀석이다. 카즈마를 개인적으로 안 좋아했던 적이 있다. 아마 카즈마는 그런 적 없을 것이다. 카즈마는 철저하게 의리고, 나는 철저하게 계산적이다. 결국 그 모든 시간이 쌓여서, 우리의 관계가 됐다. 오사카를 조만간 다녀와야겠다.
3
“Pakwan 식당이 어디죠?”
커다란 캐리어, 왜소한 몸. 공항에서 이제 막 도착한 남자가 내게 묻는다. 이 남자는 운이 좋지 않다. 여행자에게 길을 묻다니. Pakwan? 팍완? 팍완은 알지. 치킨 가라히(토마토를 넣은 카레) 맛 집이다. 숙소 옆이다. 맛만 있고, 나름 불친절하고, 양은 많다. 재방문 의사 있다.
“인도에서 왔어요? 팍완에서 일해요?”
“아뇨. 파키스탄 카라치에서 왔어요. 맞아요. 주방에서 내일부터 일해요.”
“전 라호르에서 오래 머물렀어요. 파키스탄을 굉장히 좋아해요.”
“파키스탄을 와 봤군요. 고마워요. 고마워요.”
길을 알려줘서 고맙다는 걸까? 파키스탄을 좋아해서 고맙다는 걸까? 파키스탄에 와줘서 고맙다는 걸까? 팍완은 인도 음식점이 아니라 파키스탄 음식점이구나. 한 뿌리에서 나온 나라, 파키스탄과 인도. 우리에겐 두 나라 음식이 다를까 싶지만, 어쨌든 파키스탄 음식점이다. 파키스탄 라호르에서 나는 고마운 존재였다. 우리나라에 와줘서 고맙습니다. 내 음식을 먹어줘서 고맙습니다. 사진 찍어줘서 고맙습니다. 나만 등장하면 모든 것이 고마워졌다. 남이 가지 않는 곳은 이유가 있다. 파키스탄은 결코 쉬운 나라가 아니다. 남이 가지 않는 곳만 찾는 사람도 있다. 남이 가지 않는 길로 갔더니, 최고의 여행이 되었다. 라호르의 피스타치오 아이스크림은 최고다.
남자가 제대로 가는지 한참을 봤다.
4
샌프란시스코 사람들이 화를 내는 걸 본 적이 없다. 대체로 느긋하다. 노숙자와 출근하는 사람이 인사를 나누고, 꽤 오래 담소를 나눈다. 노숙자는 집만 없지, 얼마든지 이웃이다. 저녁이면 식당 입구에 자리를 펴고, 텐트를 친다. 아침이면 주변이 더러워진다. 노숙자는 대충 정리만 하고 다른 장소로 피신한다. 식당 주인이 놔두니까, 매일 그곳에서 잔다. 5성급 호텔 앞에서 구걸을 한다. 도어맨은 보기만 한다. 카스트로 마을은 아예 성소수자들이 모여 산다. 우리나라에서 그게 가능할까? 나부터 우리 단지 앞에서 노숙자가 텐트를 친다면 반대한다. 반대하고 말고. 가난한 자, 차별받는 자들을 품은 도시는 어찌 된 일인지 부자, 여행자, 예술가들을 불러 모은다. 탐스러운 꽃으로 활짝 핀다. 꽃을 피우는 거름은, 꽃만큼 예쁘지 않아도 된다.
샌프란시스코에 노숙자가 많은 이유는 날씨 탓도 크다. 영하 30도까지 내려가는 미네소타주 미니애폴리스-세인트폴의 노숙자는 겨울이 되면 짐을 싸야 한다. 마이애미도 있고, LA도 있지만 샌프란시스코를 택한다. 차비가 있을 턱이 없다. 히치하이킹을 하고, 걷고, 길에서 잔다. 한 달, 두 달 천천히, 하지만 드디어 샌프란시스코다. 바다에서 나는 묽은 치즈 냄새를 킁킁대며 맡는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여정이지만, 그 여행은 몹시 뭉클하다. 모든 의욕이 사라지고, 모든 가능성이 차단된 ‘실패자’가 따뜻한 잠자리 하나만 생각하고 순례길에 오른다. 대부분의 사람에게 당연한 것을, 큰 꿈으로 삼는다. 이룰 수 있는 꿈을 꾸는 사람은 많지 않다.
PS 매일 글을 씁니다. 작은 오체투지입니다. 천천히, 따뜻하게 당신에게, 당신에게 다가가는 길입니다. 반갑습니다. 자주 인사드리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