샌프란시스코를 깔볼 수 있는 두 개의 봉우리
1
카스트로 마을을 보고 트윈픽스에 오른다. 오, 돌로레스 파크가 카스트로 마을에서 가깝구나. 자전거를 빌려서 세 곳을 돌겠어. 자전거를 빌리겠다. 열심히 살고 있다는 느낌은 늘 좋다.
“선생님 카스트로 가시게요? 알고도 가시는 거예요? 거기 게이들만 사는 곳이잖아요. 저는 안 가려고요.”
눈치 없는 정엽아, 신길동의 걱정왕 정엽아, 걱정을 제대로 좀 해 봐. ‘선생님’ 호칭에 번번이 놀라는데, 너 몰랐지? 좀 늙은 친구 정도로는 안 되겠니? 기억 속 나는 늘 너랑 비슷한 나이라서, 나는 네가 서운해. 자연광에서는 거울도 안 봐. 마흔여섯의 내 얼굴을 모르고 살아. 너, 좀 짜증 나. 그래서 카스트로 마을 갈 거야. 네가 가라고 했으면, 안 갔겠지. 네가 그렇게 말렸던 카스트로 마을까지는 자전거로 30분도 안 걸리더라.
2
“길을 잃으셨나요?”
50대 초반 정도의 단정한 백인 남자가 대뜸 내게 다가온다. 나는 자전거를 끌며 두리번거린 게 다다.
“그냥 여기저기 돌아보려고요. 추천해주실 만한 식당이 있나요?”
“저기 보이는 식당 있죠? 사람 많은 곳이요. 저기 괜찮아요. 모퉁이 돌아서 오른쪽은 지중해 식당인데, 저는 거기도 좋아해요.”
“감사합니다.”
“좋은 하루 보내세요."
말을 걸어준다. 그는 진심으로 나의 좋은 하루를 바라고 있다. 매일 와서, 매일 길을 잃고 싶다. 정엽이의 공포도 이해가 되고, 공포의 가치도 생각해보게 된다. 잠깐 머물면서 안전하다, 아니다를 말하려는 건 아니다. 유모차를 끌고 카페를 탐색하는 젊은 엄마, 사진을 찍는 동양인 관광객, 정말 잘 차려입은 남자와 그의 토실토실 애완견. 원색의 카페, 생기 넘치는 식당과 화려한 무지개 깃발은 정엽이의 머릿속엔 없을 것이다. 누구도 큰 용기 내서 오지 않았다. 글자로 배우는 모든 공포를 원점부터 곱씹어 봐야겠다. 일단 나부터…
3
돌로레스 파크에 온 이유는 인증샷을 찍기 위해서다. 오기 전에 선물을 받았다. 1인용 매트리스다. 손바닥만 한 크기를 펼치면 단 한 명을 위한 작은 공간이 된다. 원래는 뉴욕 센트럴파크에서 찍으려고 했다. 약속까지 했다. 숙소에서 걸어가도 되는 거리인데, 거기를 못 갔다. 후배와 딱 한 번 가기는 했는데, 그땐 매트리스가 없었다. 가야지, 가야지, 꼭 가야지. 다짐만 하고 당연한 곳을 가지 못했다. 너무도 당연한 것들에게 이제 겁을 내기로 한다. 모든 당연한 것들만 다 하고 죽겠다. 정말 하찮고, 위대한 꿈이다. 내 삶은 완성형에 가까워질 것이다.
4
로드쇼, 스크린. 80, 90년대 한국의 모든 중고등학생은 영화 잡지를 보며 어른이 됐다. 영화가 전부였다. 좀 있어 보이려면 마틴 스콜세지, 레오 카락스, 왕가위 감독을 알아야 했고, 누벨바그, 롱 테이크, 미장센이 무슨 소리인지도 알아야 했다. 데이비드 린치도 알아야 했다. 그는 트윈픽스라는 영화를 만들었다. 작은 마을에서 일어나는 끔찍한 살인사건을 신비롭게 풀어낸 감독이다. 먼저 TV 시리즈를 만들고, 같은 제목으로 영화도 만들었다. 거룩한 마음으로 과거의 영웅을 만나러 간다. 당연히 힘도 좀 들어야지. 어느 정도 각오했던 일이다. 각오는 인간의 것, 고통은 신의 영역. 고통은 주로 인간의 각오를 짓밟는데 초점이 맞춰져 있다. 트윈 픽스. 픽스. 그래 픽스(Peaks). 봉우리. 뾰족산. 샌프란시스코를 한눈에 볼 수 있는 전망대다. 자전거로 산꼭대기를 오르려 했다. 내 다리는 무책임한 머리통의 죄를 대신 뒤집어썼다. 쭉쭉 오르막이다. 도저히 못 가겠다. 순순히 자전거를 세운다. 안 되는 건 안 되는 거야. 자전거를 자물쇠로 채운다. 오기도 일종의 정신병이다. 싸우려고 온 거 아니면, 헐떡이는 폐와 쥐 나는 종아리도 돌볼 줄 알아야지. 자전거만 없을 뿐이지, 여전히 오르막이다. 누구라도 한 번쯤 살아보고 싶은 주택가지만, 다 꼴 보기 싫다. 어떻게 자전거를 타고 올 생각을 했어? 두고두고 멍청하다. 고생한 다리 덕에 트윈픽스가 저만치서 보이기 시작한다. 트윈이어서 두 개의 봉우리였구나. 몰랐다. 이름만 트윈인 줄 알았다. 그럼 두 개를 다 올라야 하는 거야? 꼭대기에 개미처럼 작아진 사람들이 몰려 있다. 일단 그쪽 꼭대기부터 천천히 오른다. 바람이 거세진다. 마주하면 볼이 저절로 빵빵해지는 강풍이다. 바람은 뭘 어쩌라는 건지, 일방적으로, 그냥, 분다. 바람막이 재킷이 꼭 필요하다. 정말 얇은 재킷을 가져왔는데, 마술처럼 바람을 막아낸다. 꼭대기 풍경은 나나 되니까 담담하지, 우리 어머니도, 쌍용 아파트 901호 아주머니도, 내 친구 영석이도 가쁜 숨을 몰아쉬며 감탄할 풍경이다. 노숙자 한 명이 정상에서 보온병 커피를 따라 마시고 있다. 어쩐지 이곳에서 잠까지 잘 것 같다. 애플 회사 직원일 것 같은 이들이 작은 카메라를 중심으로 빙 둘러서 사진을 찍는다. 360도 카메라인가? 기우제를 하는 인디언 같다. 한 남자가 자전거를 번쩍 들고 올라온다. 종아리에 쥐가 나는 투덜이 글쟁이를 모욕주기 위해 빠른 속도로 올라온다. 못 오게 막고 싶다. 밀고 싶다. 저런 인간 때문에, 보통 사람이 노오력을 강요당한다. 해보면 다 되잖아. 평범한 나약함을 비웃는다. 그의 두꺼운 허벅지와 울퉁불퉁 어깨 근육을 본다. 근육은 더 운동하면 죽을 것 같을 때 생긴다. 근섬유에 상처가 나고, 재생이 되면서 근육이 큰다. 더는 못 하겠어요. 넘볼 수 없는 고통과 공포를 이겨내야 한다. 무슨 이유로든, 노오력했다면, 그건 눈물 나게 아름답다. 나는 손뼉을 친다. 트윈 픽스에 오른 모든 사람은 천 개의 성취감 중 하나를 챙겼다. 일생 천 개의 성취감이면 충분하다. 풍경 하나를 위해 하루를 쓰는 삶, 천 개의 기억을 품으면 그 누구도 용서하며 죽을 수 있다.
그래, 정엽아! 계속 선생님이라고 불러
PS) 영화 트윈 픽스는 샌프란시스코의 트윈 픽스와 관련이 없어요. 워싱턴 주의 작은 마을로 설정되어 있죠.
나는 영화 트윈픽스도, 시리즈 트윈픽스도 보지 못했어요. 그냥 감독 이름만 알고, 그걸로 아는 척했죠. 저는 껍데기입니다.
PS) 매일 글을 씁니다. 세상 끝까지 천천히 다가가는 저만의 오체투지입니다. 저를 오늘 처음 보셨나요? 반갑습니다. 같이 갑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