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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에 그리던 재벌이 된 자의 하루

나는 내 꿈을 쓰지 못하는 병에 걸렸습니다

by 박민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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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아 바투미에서 먹었던 차와 미니 팬 케이크. 참 많이도 싸돌아 다녔네요)


(은행 잔고 3만 원에서 갑자기 이백만 원이 된 날 쓴 일기예요. 죽다 살아났으니까요. 저는 새로 태어났다고 최면을 걸어요. 그리고 소원 하나를 들어주기로 하죠. 2019년 12월의 하루입니다.)


돈을 쓸 것 - 오성급 호텔 애프터눈 티를 마실 것

새로 태어났다. 과감하고, 사치 찬란할 것. 새로 태어난 나는, 재벌 2세처럼 해맑고 싶다. 그동안 시내도 못 나갔다. 돈이 없으니, 외출을 삼갔다. 그것대로 아늑한 맛이 있었다. 통장 잔고가 뚱뚱해졌다. 세상에, 이백만 원이 넘는 통장 잔고를 보게 되다니. 만다린 오리엔탈 호텔을 갈까? 애프터눈 티를 마실까? 방콕에서, 아니 세계에서 제일 유명한 애프터눈 티를 거만하게 한 번 마셔 줘? 후배 규성이가 방콕에 왔을 때, 분위기 좋은 카페를 추천해 줬더니, 저 남잡니다. 이러더군. 남자 규성이와 남자 박민우는 뭐가 다른 거지? 나는 왜 좋지? 볕 좋은 카페에서 느긋함을 우리고, 또 우려서, 마시고, 느끼는 시간이 울렁댈 만큼 좋지? 6,7만 원을 한 번에 쓸 수는 없어. 아무리 맛있고, 좋아도. 그건 선을 넘는 거야. 선을 넘어볼까?

행복에 대한 강박은 쓸모가 있을까? 최고의 하루여야 한다. 아침부터 진정이 안 돼. 하고 싶다고 마음만 먹으면 다할 수 있게 됐거든. 돈이 있으니까. 시간이 있으니까.

가성비 방콕 애프터눈 티

'가성비'란 단어를 굳이 넣어서 검색해야겠냐? 싸면 싼 대로 이유가 있는 거야. 비싸면 비싼 대로 이유가 있듯이. 박민우 진짜 실망이다. 아니, 가만! 하얏트 호텔이랑, 쏘 방콕. 둘 다 오성급 호텔인데 이만 원? 똑 떨어지는 이만 원? 세금, 봉사료까지 포함해서 이 가격이라고? 싸면 싼 대로 이유가 있겠지. 별 다섯 개 호텔에서 에이 괜히 왔네. 부자들 옆에서 격렬하게 투덜대고 싶다고. 마이리얼트립이란 애플리케이션을 일단 다운로드하라고? 삼천 원 할인쿠폰도 준다고? 그러면 만 칠천 원인 거야? TWG 차를 마시고, 케이크를, 연어가 올라간 미니 샌드위치를 먹고 만칠 천 원? 와, 와 이미 행복하다. 안 가고 만 칠천 원을 기부해도 될 정도로.

-축하합니다. 삼천 원 쿠폰을 확인하세요.

확인했지. 삼만 원 이상을 써야 할인해 준다고? 이만 원 짜린데, 삼만 원을 무슨 수로 채워? 할인쿠폰 새끼야, 꺼져 꺼져. 이만 원 그냥 내지 뭐. 이만 삼천 원을 쓰는 것 같은 기분 느끼게 해 줘서 고맙다.

왜지? 쏘 방콕은 5일 후에나 가능하고, 하얏트 호텔은 이틀 후에나 예약이 가능한 이유가 뭐지? 그래서 싼 거야? 원하는 날, 당장 먹게 해 주면 미쳤다고 이만 원이냐고? 호텔은 배달의 민족이 아닙니다만? 자본주의 보충수업을 일대일로 해주시겠다? 심호흡, 심호흡. 좀 더 검색하자. 차만 마시면 되는 거야. 페닌슐라 호텔은 어때? 너무 먼가? 쎄인트 레지스 호텔은? 호텔 이름은 낯선데, 평이 굉장히 좋군. 맛만으로 치면 최고라는 후기도 있네. 그런데 왜 2인 세트뿐이지? 혼자서 2인 세트를 먹을까? 호텔에 전화를 해? 1인 세트 메뉴도 있냐고? 무슨 또 전화씩이나. 가지 말까?

가지 말자.

신었던 양말을 벗는다. 가기 싫어졌다. 십억이 생기면 부모님께 분당의 아파트를 사드리고 싶다. 원래 분당 야탑동에 아파트가 있었다. 형이랑 나랑 장사한다고 빚을 지는 바람에, 아파트를 팔았다. 판 이후에 몇 억이 올라버렸다. 평생 모으신 재산을 자식 두 놈이 말아먹었다. 지하철이 가까운 역세권에서 안락한 노후를 보내실 수 있었다. 그 노후가 날아갔다. 누구보다 열심히 산 부모님께, 나는 어떻게든 아파트를 사드려야 한다. 십억이 생겨도 못 사드릴 것이다. 200만 원에서 6만 원을 못 쓰고 있다. 200만 원을 지키고 싶은 마음이 욕망의 가장 윗대가리를 차지했다. 잘 모아서 남미 가고 싶고, 아이폰 사고 싶다. 통장 잔고 3만 원일 때는 없던 꿈이다. 꿈을 이루니, 꿈에 압도되고, 꿈 이전의 자신을 부정한다. 이백만 원으로, 내 쪼잔함의 크기를 알았다. 가성비 끝판왕의 깨달음이다. 내가 얼마나 작은지 알았으니, 나의 장담이, 약속이 얼마나 하찮은지도 안다. 오늘은 빨래를 좀 해야겠다.


PS 매일 글을 씁니다. 글의 힘을 믿습니다. 연결의 힘을 믿습니다. 우리는 연결되어 있어요. 언제나 돌아설 수 있습니다. 대신 언제나 돌아올 수도 있죠. 제가 여기서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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