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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모두의역사 Mar 12. 2021

독립영웅 아웅산은 왜 제국 일본에 열광했을까?

1시간 만에 이해하는 미얀마 쿠데타의 본질, 그 5편

이 브런치북을 발행하기 앞서, 2021년 미얀마 쿠데타로 유명을 달리한 분들께 애도를 표합니다.

이 글은, 미얀마 사태를 보다 본질적으로, 그러나 어렵지 않게 보자는 취지로 만든 콘텐츠입니다.




미얀마 국민의 '진정한 민주화'에 대한 열망을 멀리서나마 응원합니다.






전편 : 4편, 일제에 협력했다 해서, 모두 악인은 아니다 (feat. 아웅산)








우리 인생은
'결과'가 중요할까?
'과정'이 중요할까?





미얀마 쿠데타를 계기로 역사 인물을 탐구해 보니... 결국 인생도 역사도 결과가 중요하지만, '과정'이 주는 감동과 교훈 또한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것 같다. 우리 김구 선생이 독립운동에 실패하고 암살당했다해서, 그의 전체 인생을 평가절하하지 않는 것처럼 말이다.





타국에서마저 무장투쟁에 인생을 바쳤던 김구 선생님(우측 세번째)






미얀마의 국부, 아웅산의 인생도 마찬가지었다.




아웅산도 결과적으로 조국의 진정한 독립을 이루지 못하고 눈을 감았지만, 후대는 그를 존경한다. 왤까? 그들의 인생이 한결 같았기 때문이다. 우리는 독립운동가의 제국주의에 대한 '자주 독립', 그 한결같은 절개를 우러러본다. '독립운동 과정'에 있던 사소한 흠결 하나하나에 꼬투리를 잡지 않는다. 우리가 오늘날을 살아가는 과정에도 상기해볼만 한 역사적 평가다.




언행의 일.관.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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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대표적 인물이 바로, 현재 구금된 아웅산 수치의 아버지, 아웅산 장군이다.




미얀마 국부 아웅산 장군(좌)과 현재 구금된 그의 딸 아웅산 수치(우)





때는 1942년 8월로 돌아간다.
미얀마의 경제수도 양곤에 일본군이 들어섰다.






[2021년에도 가장 큰 규모의 쿠데타 반대시위가 열리는 양곤 시내]





원래 미얀마를 점령했던 영국이 나치독일과의 혈전으로 인해 본토로 병력을 뺀 사이, 일본군이 미얀마를 점령해버린 것이다. 그 일본군 사이에, 피부빛이 다른 미얀마인이 몇몇 섞여 있었다. 이들은 '버마독립의용군'으로서, 훗날 미얀마 건국의 주역이 된다. 그 리더 자리에 섰던 이가 바로, 아웅산 장군이다.




일본 군복을 입고있는 아웅산 (미얀마 1짯 지폐)




아웅산은 그들 사이에서 테자(Teza)라 불렸다. 미얀마어로 '불꽃'이란 뜻이다. 이 불꽃은 욱일승천기에서 영감을 받아 지은 이름이다. 맞다. 우리가 아는 그 전범기 말이다.










도대체 아웅산에게 무슨 일이 있던 걸까?



또다시 약 2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1940). 아웅산은 미얀마 최고 명문인 양곤대학에서 총학생회장에 임하며, 엘리트 학생운동가로서 미얀마의 독립을 꿈꿨다. 그러다 인도의 전설적 독립운동가 네루와 인연이 닿았다. 인도와 미얀마는 영국의 오랜 식민지배를 받았기 때문에, 서로가 서로를 알아본 것이다.








국제사회에서 적의 적은 곧, 아군이기에...


인도 독립운동 행사에 참가한 아웅산(우), 그를 초대한 네루(1940)






아웅산은 네루의 초대로, 인도 국민회의 총회(1940)에 참석한다. 그 자리에는 간디도 참석했을 만큼, 전세계의 이목을 끄는 상징적인 자리였다. 이런 큰 행사에 연사로 초대된 것이다. 이로인해 미얀마의 젊은 독립운동가는 일약 스타덤에 오른다.




하지만, 독립운동가로서의 유명세는 결코 좋은 일만은 아니었다. 아웅산은 영국 식민경찰의 표적이 되고 말았다. 결국 그는 감시를 피해, 중국으로 피신한다. 일전에 버마공산당에서도 활동한 경력이 있어, 마오쩌둥의 힘을 빌려 중국공산당과 협력을 할 공산이었다. 그렇게 중국공산당이 있던 옌안으로 향하려던 찰나... 그는 돌연 도쿄로 행선지를 옮기게 된다. 무슨 일이 있던 걸까?





도리어 아웅산의 비범함을 알아본 이는 일본 제국이었다.





당시 일본은, 임진왜란 때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꿈이었던 인도 진출을 위해 중일전쟁(1937~1945)을 일으켰다. 당시 일본 육군의 기세가 아무리 무시무시했더라도, 조그만 나라가 조선 반도만 착취해 대동아 공영권의 꿈을 실현하기 불가능했다. 여기저기 싸질러놓은 전쟁의 군수물자를 대기 위해서, 일본에게 동남아 진출 필수적이었다. 그래서 서구에 의해 가혹한 식민지배를 받고있는 동남아를 (형식적으로) 해방시킬 필요가 있었다. (조선은 독립시킬 하등의 이유가 없었지만 말이다.)





일본의 대동아 공영권 계획








그렇게 동남아 민족지도자로서의 깜냥이 되는 리더감을 포섭하다 레이더망에 걸린 인물이 바로, 아웅산이다.









아웅산을 발굴한 스즈키 게이지는 동남아시아에서 영국에 저항할 수 있는 반군을 키우고자 한, 일본의 공작단체 남기관 기관장이다. 스즈키는 군인이었으나, 언론인으로 신분을 세탁하며 일제에 협력할 동남아시아의 미래 지도자격 인물을 찾아 다녔다. 그러다 아웅산이란 대어를 낚은 것이다. 그의 지도아래, 청년 독립운동가 아웅산은 '아웅산 장군'으로 거듭다.




스즈키의 설득 끝에, 아웅산은 마오쩌둥이 있던 옌안이 아닌, 대동아 공영권의 '황도' 도쿄로 향한다. 마침 도쿄는 나치독일과의 추축국 동맹 조인식(1940.9.27.) 에 사인 후, 축하 행사를 벌이고 있었다. 아웅산은 도쿄 곳곳에 욱일기와 나치기의 장엄한 펄럭임을 목도한 것이다.




추축국 동맹 조인식 [A급 전범으로 사형당한 도조히데키(가운데 대머리)] 1940.9.27




아웅산은 일본의 당시 발전된 모습에 매료되었다 ['국가총동원령(1938)'으로 조선을 심히 착취한 결과라 볼 수 있다]. '아시아의 희망'  일본이 대동아공영권을 실현해, 미얀마 독립에 힘을 보태줄거라는 이상적인 꿈을 꾸기 시작했다. 아웅산은 일본 군국주의와 전체주의를 모델로 한 미얀마 독립을 염원했다. 도리어 영국과 미국식 민주주의는, 식민지배를 겪고있던 아웅산에게 혐오스런 사상이었다.





기모노를 사랑했던 아웅산





그는 사상개조를 마치고, 미얀마로 돌아가 남아있던 옛 학생운동권을 설득했다.




그들에게 세계 정세와 일본 군국주의의 위대함을 설파했다. 아웅산의 설득 끝에, 결국 그들은 일본의 대동아공영권에 심취하게 됐다. 아시아에 어울리지 않는 개인주의, 자유주의, 자본주의를 박멸하고 일본 군국주의를 모델로 한 미얀마를 건설하자 서로 굳게 다짐했다. 그렇게 뜻을 함께할 '30인의 지사'를 이끌고, 스즈키의 도움을 받아 중국 하이난섬으로 이동했다. 그들은 그렇게 6개월 간 혹독한 일본식 제식훈련을 받고, 일본을 위한 각종 전투에서 일본도(刀)를 휘두르게 된다.





버마독립의용군(앞줄 왼쪽에서 4번째가 아웅산)





그렇게 2021년 미얀마 군부의 기원이, 아웅산을 중심으로 싹트기 시작한다.



(다음화 계속)






위 포스팅은 [1시간 만에 이해하는, 미얀마 쿠데타의 본질] (가제) 브런치북으로 발행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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