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 밤이


올해도 어머니는 꿈에 나타나지 않았다. 아침 일찍 딸에게서 전화가 왔다. 꿈에서 어머니를 만났다고 했다.
"할머니가 잘 지내고 있으니까 걱정하지 말래."
기일마다 어머니는 딸 꿈에 찾아갔다. 어머니가 꿈에서 하는 말을 몇 년째 비슷했다. '이젠 안 아프다, 다 나았다, 그러니 걱정하지 말아라.'
전화를 끊고 출근 준비를 했다. 밥 대신 물을 한 잔 더 마셨다. 물컵을 내려놓는데 미숫가루가 생각났다. 어머니가 살아있을 땐 집에 미숫가루가 떨어진 날이 없었다. 보리, 율무, 찹쌀을 섞어 미숫가루를 만드는 건 어머니의 버릇이었다.

어머니 고향은 함경도 어디라고 했다. 어머니도 잘 몰랐다. 전쟁을 피해 원주로, 부산으로 피난 갔을 때 어머니 나이는 세 살이었다. 고향은 잊었지만 미숫가루를 침에 섞어 우물거리며 걸었던 산길은 희미하게 떠오른다고 했다.

어머니는 구 남매 중 다섯째였다. 할머니가 그렇게 기다리던 아들이 태어났을 때 어머니 나이는 열 살이었다. 할머니는 행상으로 자식들을 먹여 살렸다. 이미 다 큰 언니 둘은 결혼을 했고 다른 언니 둘은 돈을 벌러 나갔다. 살림은 어머니가 도맡았다. 동생을 업고 밥을 짓고 하루에 스무 통씩 물을 길어 날랐다. '빠께스'라고 부르는 양철통을 머리에 이고 산동네 계단과 오르막길을 날듯이 뛰어다녔다. 어머니는 자신의 달리기 실력이 물지기에서 나왔다고 확신했다.

딸아이 초등학교 운동회에서 학부모 달리기 주자로 어머니가 나섰다. 어머니가 달리기 시작하자 구경하던 사람들이 입을 다물지 못했다. 어머니는 손등에 찍힌 스탬프 도장을 내 눈앞에 쑥 내밀며 말했다.
"왕년 솜씨 다 죽었다. 2등이 뭐고."
친구들 사이에서 가장 빨랐다던 어머니 말이 전부 허풍은 아닌 듯싶었다. 어머니 말에 따르면 물지기가 달리기에만 영향을 끼친 건 아니었다.


"내가 와 짝은 줄 아나. 하도 물통을 져 안 그르나. 만날천날 머리 위에 무거븐 물통이 올라가 있는데 우예 크겠노."
"그럼 외할머니는 왜 작아?"
"할마이도 그랬겄지. 옛날엔 다 물 길어다 먹었다."
"그러면 나는 왜 작아."

키가 작다는 걸 빼면 나는 어머니를 닮은 구석이 별로 없었다. 하루치의 행복과 웃음이 모두 어머니에게서 나오던 시절엔 어머니를 닮지 않은 얼굴이 불만스러웠다. 이유를 물으면 어머니는 그게 다 자신의 기도 때문이라고 대답했다.
"니 뱃속에 있을 때 나 닮지 않게 해 달라꼬 내 억수로 빌었다아이가."


어머니는 중학교를 졸업하고 버스차장 보조를 시작했다. 버스에 올라타는 사람들을 안으로 밀어 넣고 딱 맞는 거스름돈을 손바닥에 재빠르게 올려 주는 기술을 배웠다. 종점에 도착하면 버스 바닥을 쓸고 의자를 걸레로 닦았다. 퇴근하기 전 남자 계장이 여자 차장들을 줄 세웠다. 차비를 숨겼을지 모른다는 혐의를 핑계로 몸을 더듬고 옷을 벗기기도 했다. 손을 피하거나 항의하면 계장은 되레 큰소리를 쳤다. 훔친 게 없는데 왜 당당하지 못하냐며 오히려 몰아세웠다. 어머니는 한 달 만에 차장 일을 그만뒀다.

야간 고등학교에 보내 준다는 전봇대 광고를 보고 방직 공장에 취직했다. 사기는 아니었다. 입학은 했지만 학교에 갈 수 없었다. 화장실 가는 시간까지 아껴서 일을 해도 할당량을 채우려면 매일 야근을 해야 했다. 어머니는 그렇게 번 돈으로 식구들 먹을 보리쌀을 샀다.

어머니는 내가 어머니 자궁 밖으로 나오기 전에, 아니 어머니 배 속에 자리 잡기도 전에, 어머니가 아버지를 만나기 전부터, 피곤한 몸으로 어두운 골목길을 걸어 판잣집에 들어서며, 그보다 더 거슬러 올라가 포대기 허리끈 동여매고 밥을 짓던 어린 시절부터 내가 당신을 닮지 않길 간절히 염원했을지 모른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지하 1층 버튼을 눌렀다. 내려가는 동안 고개를 돌려 벽에 붙은 거울을 바라봤다. 언제부턴가 얼굴에서 어머니 표정이 비췄다. 닮지 않길 바랐던 어머니의 기도는 헛된 꿈이었을까. 그때 어머니가 나 대신 자신의 복을 갈구했다면 어머니는 아직 살아 있을까. 어쩌면 어머니는 자신을 위한 기도는 올린 적이 없었을지 모른다. 새벽길 나선 할머니가 무사히 돌아오길 빌고 어린 동생들 밥 굶지 않길 바랐던 소망이 종국엔 나를 향해 흐르고 고였을 것이다.

어머니는 스물세 살에 나를 낳았다. 수시로 젖을 물려 통통하게 살찌웠다. 걸음마를 시작하자 주름이 잔뜩 잡힌 하얀색 원피스를 입혔다. 다섯 살이 넘도록 업어서 잠을 재웠다. 비가 오면 우산을 들고 기다렸다. 겨울이면 빨간색 털실로 목도리를 짜서 둘러줬다. 내가 누린 일상은 어머니의 꿈이었다. 배부르게 먹고 포근하게 잠들고, 공부를 하고, 살림 밑천으로 자신이 번 돈을 내놓지 않아도 되는 지극히 사소한 일상. 나는 어머니의 꿈이었다.

거울 아래에는 하얀색으로 병원 광고가 적혀 있었다. '이영수 내과병원/ 진료과목 소화기내과 순환기내과' 어머니가 처음 몇 년간 치료받은 병원이었다. 첫 진단은 당뇨였다. 어머니는 크게 놀라지 않았다. 외할머니가 당뇨를 오래 앓다 돌아가셨고 둘째, 넷째 이모도 당뇨로 고생 중이었다. 당뇨는 가족력이고 찜찜하지만 당장 죽을병은 아니었다. 어머니는 언젠가 올 줄 안 언짢은 손님 맞듯 당뇨를 받아들였다.

일 년 뒤 보건소에서 지방간 진단을 받았다. 약을 삼 개월 먹으라는 처방에 어머니는 추가로 삼 개월을 더 먹었다. 약을 두 배로 먹으면 두 배로 건강해질 거란 막연한 믿음 때문이었다. 알약이 두 개에서 다섯 개로 늘어나는 동안 어머니는 안 자던 낮잠을 몇 시간씩 자고 길에서 여러 번 넘어졌다. 나는 어머니의 상태가 작은 알약 몇 개로는 치료할 수 없다는 걸 직감했다.

균형을 잃고 말투가 어눌해지는 증상을 근거로 파킨슨병을 의심했다. 두 번 찍은 뇌 사진에서는 문제가 나타나지 않았다. 정밀검사 후 받은 결과는 '원인을 알 수 없는 급성 간경화'. 어머니는 믿지 않았다. 어머니에게 간경화는 이십 년 전 같은 동네에 살았던 '개망나니 술고래' 아저씨나 걸릴만한 병이었다. 다른 병원 두 곳에서 재검사를 받았다. 어머니는 같은 결과가 나온 여러 장의 진단서를 해석되지 않는 암호문처럼 한참 동안 들여다봤다.
"작년에 보험만 나났어도 을매나 좋았겠노."

어머니는 한 달에 이만 원씩 십 년 동안 상조비를 부었다. 상조회 회장이 부도를 내고 잠적한 사건이 뉴스에 떠들썩하게 보도됐을 때 어머니는 같은 이름 다른 상조회라 굳게 믿었다. 뒤늦게 전화통을 붙잡고 이곳저곳 수소문했지만 한 푼도 보상받지 못했다. 십 년 세월을 배신당한 어머니는 상조회 증서를 찢고 건강보험 두 개를 해지하는 것으로 화를 풀었다. 보험회사에 다니는 셋째 이모 부탁으로 몇 해 전 들었던 보험이었다.

감당할 수 없는 커다란 불행 앞에서 고통을 합당하게 만들어야 감내할 수 있다는 듯 인간은 스스로 죄목을 찾는다. 나중에 어머니는 고백하듯 말했다. 무슨 죄를 지었기에 이런 병에 걸렸을까 돌아보았다고. 나는 내게 책임이 없는지 물었다. 나를 키우고 내 딸까지 키우느라 어머니가 병에 걸린 건 아닐까 가책했다.

내가 아이를 가졌을 때 어머니는 못마땅해했다. 이제 겨우 나이가 오십인데 벌써 할머니 소리를 듣게 한다고 불퉁거렸다. 그래 놓고 손녀에게 홀딱 빠졌다. 어머니의 불평은 '엄마'로 먼저 살아본 여자가 이제 '엄마'로 살아갈 여자를 향해 내뱉은 안쓰러움이었다. 전화를 걸어 나보다 밑반찬 안부를 먼저 챙기던 어머니 방식의 걱정이었다.

딸이 두 살이 됐을 때, 어머니에게 아이를 맡기고 직장을 구했다. 어머니는 내게 먹였던 원기소를 딸에게 먹이고 다섯 살이 되도록 업어서 재웠다. 딸과 나는 같은 손으로 지은 밥을 먹고 같은 등에 업혀 같은 자장가를 들었다. 나만큼 미숫가루를 좋아하는 딸을 보며 나는 딸과 내가 같은 '엄마'에게서 자랐다고 생각했다. 어머니는 나를 닦였던 손으로 딸을 씻기고 나를 안았던 품에서 딸을 토닥였다. 어머니가 쓰러졌을 때 언젠가 동네 아줌마에게 들었던 말이 떠올랐다. 할머니가 얼마나 걷어 먹이고 깨끗하게 씻기는지 애가 반질반질 윤이 난다고.

어머니는 급속도로 상태가 나빠졌다. 존재를 모를 땐 숨어있던 병세가 이젠 숨을 필요가 없다는 듯 맹렬한 기세로 정체를 드러냈다. 처음 몇 해는 나으리란 희망을 가졌다. 비싼 건강식품을 구입하고 잘 본다는 병원을 수소문했다. 간암을 이겨냈다는 사람이 출간한 수기를 읽었다. 치료에 탁월하다는 재료를 구해 상을 차렸다. 수치가 좋아진 날엔 들떴다가 응급실에 가면 절망하기를 반복했다.

그렇게 오 년을 보내고 나는 어머니의 완쾌를 포기했다. 꼬박꼬박 약을 챙기고 응급상황에 빠르게 대처하고 병이 더디게 진행되길 바라는 게 전부였다. 이런 생각이 들었다. 만약에 아픈 사람이 나였다면, 어머니가 나를 돌봤다면 어머니도 이쯤에서 나를 포기했을까. 아니, 내가 나를 포기했을까. 더 악착같이 나을 방법을 찾아 헤매진 않았을까. 나는 내가 한 포기가 최선의 실패인지 확신할 수 없었다.

응급실에 들어갔다 나올 때마다 삶의 질은 떨어졌다. 누워있는 시간이 점점 더 길어지고 혼자 외출이 불가능해졌다. 아픈 어머니가 일상이 되어가는 시간은 틀린 맞춤법으로 적어 내려가는 작문 같았다. 지독히도 넓은 행간은 고통의 율격으로 채워졌다.


어머니가 해줬던 일을 겨우겨우 흉내 내며 고수련했다. 먹이고 씻기고 기저귀를 바꾸는 일은 갈수록 힘에 부쳤다. 병실 앞에서 이번엔 병원비가 얼마나 나올지 걱정했다. 못된 모서리가 뒤집히고 치사한 바닥이 드러났다. 외면하고 도망치고 싶은 마음을 부인할 수 없었다. 보잘것없는 내 사랑을 고마워하는 어머니가 가여워 부아가 났다. 마음이 난파선처럼 밀려갔다 밀려왔다. 슬픔은 마침표를 잃어버린 듯 계속 울먹거렸다. 결국 어머니 앞에서 울어버리면 딸이 위로했다.


"엄마는 원래 울보잖아, 할머니. 내가 있으니까 걱정하지 마."
딸은 주삿바늘에 찔려 멍든 어머니의 손등을 쓰다듬었다. 어머니의 짧은 흰머리를 이쁘다며 넘겨주었다. 어머니는 자신이 품고 키운 나와 딸을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 생기 잃은 야윈 몸피 어디에 숨어 있었는지 모를 고운 미소였다.

이별은 예고 없이 찾아왔다. 병원에서 죽고 싶지 않다고 소원했는데 어머니는 그 하나만은 온전하게 이뤘다. 유품은 단출했다. 걸을 수 없게 됐을 때 어머니는 자신의 물건 대부분을 처분했다. 죽음은 실로 중요한 것만 남긴다고 했던가. 구 남매 생일과 식구들 기념일이 적힌 작은 수첩에 사진 한 장이 꽂혀 있었다. 학사모를 쓴 내 옆에 지금 나보다 젊은 어머니가 서 있었다. 어머니는 꿈을 이룬 듯 기쁨에 찬 표정이었다. 나는 어머니의 모습을 눈으로 따라 그렸다. 내 팔짱을 끼고 있는 어머니 손에 손가락을 가져다 댔다. 빛나는 것을 바라보듯 눈을 감았다. 심장에 박듯 사진을 꼭 끌어안았다. 어머니의 미소가 가슴으로 뜨겁게 흘러내렸다.

따뜻한 물을 한 컵 담아 책상에 앉았다. 먹은 것도 없는데 체한 듯 속이 불편했다. 딸이 보낸 문자를 확인했다. '엄마가 울면 할머니가 속상해해. 그러니까 울지 마.' 감은 눈꺼풀 위에 손가락을 올렸다. 어머니의 얼굴을 떠올렸다. 내가 우는 모습이 보기 싫어 어머니는 내게 오지 않는 걸까. 어머니를 만나면 내가 울까 봐 딸에게 전하는 걸까. 다 나았다고, 이젠 아프지 않다고. 걱정하지 말라고. 어머니를 보러 가서 울지 말아야지 결심했다. 그렇게 하면 어머니가 내게도 찾아올까. 어머니가 내 이름을 부르며 두 발로 걷는 모습을 보면 울지 않을 재간이 없겠지만, 어머니는 알고 있을 것이다. 꿈에서나마 '엄마 엄마' 부르며 어머니 가슴에 안겨야 풀릴, 명치끝에 걸린 아픈 내 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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