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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책닮녀 Jun 13. 2024

언니에게

차마 부치지는 않을 편지

진짜 오랜만이네. 초등학교 때 언니가 나에게 보낸 크리스마스 카드를 발견했어. 카드 속에는 첫 번째 언니 말을 잘 듣는다. 두 번째 언니 심부름을 잘한다. 세 번째 언니가 시키는 대로 한다. 뭐 그런 내용이 었었던 것만 뚜렷이 기억나고, 다른 이야기는 기억이 나질 않네. 내가 보낸 카드도. 그 이후로 이런 유치하지만 깜찍한 편지마저도 주고받지 않은 것 같아. 



세 살 차이가 참 많다면 많겠지만, 또 어찌 보면 그리 많은 나이는 아닌데, 언니는 늘 내게 보호자 역할을 하곤 했어. 초등학교 때 준비물을 챙겨 오지 않아서 매일 언니네 교실 앞에 가서 울곤 했잖아. 그런 나를 보고 언니 친구들이 '야야 네 동생 또 왔다'라고 하면 언니는 눈을 흘기고는 내게 다가왔지. 또 왜 왔냐고 신경질을 내긴 했지만 내가 놓친 준비물을 구해주고 챙겨주었어. 6학년인 언니가 졸업하고 내가 4학년이 되어서 초등학교에 혼자 남았을 때, 준비물을 안 가져와도 더 이상 어딘가로 가서 도움을 요청할 수가 없었어. 물론 준비물 조금 빠트린다고 큰 일도 생기지 않는다는 것, 빠트린 내 행동에 책임을 지면 된다는 귀중한 교훈을 얻긴 했지만, 언니가 같은 학교에 있지 않다는 생각에 마음이 허전하곤 했어. 



내가 중학생일 때 엄마가 식당을 하느라 늦게 들어오는 날이면 언니가 종종 밥을 차려주곤 했잖아. 지금은 내가 요리를 더 잘하지만, 그땐 언니가 요리를 더 잘했었는데. 언니의 첫 요리다운 요리를 내가 맛봤지. 빨갛게 양념이 된 제육볶음에 땡초와 깨가 뿌려진 김이 모락모락 나던, 먹음직스러운 식탁의 풍경은 잊을 수 없어. 내가 언니에게 엄지 척해줬던 거 기억나? 고등학생인 언니와 중학생인 나 사이에 용돈의 정도 차이는 있었지만, 언니는 항상 아껴 써서 용돈을 저축했고, 나는 항상 모자랐잖아. 그런 내게 용돈도 주고, 수학여행 갈 때 예쁜 사복도 사줘서 고마워. 언니따라 처음 영화관에 갔던 것도 특별했어. 심은하를 좋아하던 언니가 보여준 텔미썸띵. 중학생인 나에게 엄청나게 충격적인 내용의 영화였지만, 그땐 멀티플렉스가 없을 때라 영화관 가본 아이들이 별로 없어서 그날의 경험을 자랑스레 발표하기도 했어. 15분인 발표시간이 모자랐다니까. 또 대학생이 된 언니는 아웃백도, 티지아이에프도, 빕스도 데려가줬잖아. 언니 덕분에 난 신문물에 뛰어난 인싸가 되곤 했지.



성인이 돼서 주말에 새로 산 옷을 '네가 입네, 내가 입네', 식당을 하는 엄마를 도와야 해서 '토요일에 내가 나가네, 네가 나가네' 치열하게 다투긴 했지만, 그런 언니가 있어서 고마웠어. 정장을 싫어해서 어디 격식을 차린 곳에 가려면 입을 옷이 없을 때마다 언니 생각이 나. 옆에 있었으면 빌려 입었을 텐데. 아가씨가 옆동네에 살지만 아가씨에겐 옷을 빌릴 수는 없잖아? 물론 사이즈가 더 문제겠지만. 또 잠깐 아이를 봐줄 누군가가 있었으면 좋겠다 생각할 때도 언니가 생각나. 시간은 많은데 같이 맛있는 해장국을 먹으러 갈 사람이 없는 날 언니가 생각나. 코스트코에, 백화점에 쇼핑하러 가는 날도 언니가 생각나.



무엇보다 엄마가 아프고 아빠가 아프고, 집에 무슨 일이 생겼을 때 언니가 있어서 얼마나 다행인지 몰라. 인생이란 엄청난 모험 속에서 엄마 아빠 말고 또 다른 내 편이 있다는 게 든든해. 비록 멀리 떨어져 있어서 예전처럼 같이 쇼핑도, 문화생활도 못하지만, 다정한 말로 서로를 어루만져주는 그런 애틋한 사이는 아니지만 언니가 있어서 모험을 해 나갈 두둑한 베짱이 한 겹은 더 생긴듯 해. 뭐니 뭐니해도 언니가 있어서 가장 좋은 점은 엄마 흉을 볼 사람이 있다는 거, 아빠 흉을 볼 사람이 엄마 말고 또 있다는 거, 남편 흉을 볼 사람이 엄마, 아빠 말고 또 있다는 거. 언니는 나에겐 엄청난 행운같은 존재야. 부디 나도 언니에게 그런 존재이기를.



그림책으로 글쓰기 9기 - <그레이엄의 빵 심부름> 을 읽고

모험하는 도중 위험이 생겼을 때 도움을 줄 누군가를 떠올려 편지를 써봅니다. 나의 언니에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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