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실한 공간에 어떤 희망을 채워본다
나는 어떤 이별을 경험하고, 그에 관한 내용으로 일기장 한 권을 빼곡히 채웠을 뿐 아니라, 한동안 나는 그 경험이 내 삶에 존재했던 유일한 경험인듯한 환각에 빠져있었다.
내 삶을 2년여간 지배한 그 사람과의 추억은, 내 인생에서 단 몇 페이지일 뿐이라는 사실이 불현듯 와 닿은 것은 최근이었다. 나는 우연히 보게 된 어떤 콘텐츠들로 내 인생에 있었던 수만 가지 이벤트들을 떠올렸다. 내가 빠져 있었던 음악, 음악가, 내가 했던 여러 가지 활동들, 내 일생의 관심사들...... 그 사람이 부재했을 때 이루어진 모든 사건들과, 지금의 나에 대해 말할 수 있는 온갖 소재거리들.
내 삶은 그렇게 삭막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꽤나 풍부했다. 적어도 내 생각보다 훨씬.
나는 과거에 내가 그런 일들에 집중하며 느꼈던 행복감과 만족감을 상기했다.
나는 상실로 인한 고통을 해소할 대안은 새로운 누군가를 만나는 방법뿐이라고 여겨왔지만 그 방법 밖에도 내 가슴을 뛰게 해줄 일들이 있을 것 같다는 희망이 들기 시작했다.
사실 나는 이미 그러한 것들을 시도한 바 있다. 막 이별을 겪고 힘들었던 당시의 나는 그 사람의 흔적을 지우려는 시도를 숱하게 했었다. 새로운 것들을 배웠고, 그 사람에 관한 생각이 밀려오지 않게 하기 위해 치열히 시간을 보냈다.
그러나 그때의 활동들은, 고통을 잠시라도 멎게 할 목적만을 가지고 있을 뿐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당연히 그 활동이 흥미롭거나 가슴이 뛰지 않았고 그 자체를 즐겁게 여길 수 없었다.
슬픔으로부터 도피하기 위해 했던 그 활동들을 통해, 나는 분명 얻은 것들이 있고 그것들은 나의 양분이 되었다. 그러나 그렇게 나를 강제 출석시키듯 해왔던 활동들에는 한계가 있었고 어느 순간에는 염증마저 느껴졌다.
하지만 그런 활동이 도피가 아닌, 순수한 즐거움을 위한 것이라면 내용의 질뿐 아니라 삶의 질도 크게 달라질 것이다. 그 사람과의 이별을 경험하기 전의 나처럼 말이다.
자, 드디어 한 단계 올라온 것 같다. '무엇으로 고통을 잊을 수 있을까?'가 아닌, '무엇이 내 가슴을 뛰게 해줄 수 있을까?'로.
이제, 무엇으로 내 가슴을 뛰게 할 수 있을까?
앞으로의 내 인생은 무엇으로 풍부하게 채울 수 있을까?
2017.10.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