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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피한약방

어떤 공간은 그 공간 자체로 환대가 된다

by 모과

적당히 알고 지내는 사장님을 소재로 글을 쓰려하니 쓰면서도 계속 눈치를 보게 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장인어른에 대한 이야기를 쓰며 혹시 장인어른이 블로그 이웃신청을 하는 건 아니겠지...? 하는 마음과 거의 유사한 상태로 을지로 카페를 이야기를 쓰고 있었던 것이다. 한 두 번은 그렇다해도 계속 그럴 수는 없어 방향을 조금 바꾸기로 했다.


사실 괜히 찔리는 마음이 들어 며칠 전 데일리카페인에 갔는데 평소보다 사장님이 말수가 없어진 것 같아 에스프레소를 기다리는 내내 조마조마했다. 다행히 잔을 받아들기 무섭게 새로운 주체로 폭풍 대화를 걸어오셨다. 점심시간이라 바빠서 말을 하실 수 없었던 것이었다.

여하튼 무언가를 쓰는 것 역시 용기가 필요한 일이라는 것을 새삼 되새긴다.


그리하여 이번엔 가게 사장님과는 전혀 관계없이, 처음부터 끝까지 공간 자체에 대한 이야기만 털 수 있는 매장을 골랐다. 바로 을지로 3가에 위치한 커피한약방이다.


한약방이 오픈한 해가 2013년이었는지, 2014년이었는지는 대부분 알지 못한다. 그만큼 한약방은 을지로의 맹주이자 지금의 소위 힙지로가 시작되는 기원의 기원이라고 볼 수 있다. 십분의일과의 인연도 깊다. 비록 그 인연이 한약방의 의사와는 무관한 일방적 인연이긴 하다만. 십분의일이 만들어지던 2016년, 멤버들과 늘 회의를 하던 곳이 커피한약방이었다. 당시는 아직 멤버들이 다들 알게 된지 얼마 안되어 적당히 서로 예의를 차리며 하하호호 웃었던 시절이었기 때문에 어째 공간 마저 따뜻한 느낌으로 남아있다.

특히 을지로 3가의 존재 자체를 몰랐던 당시의 나에게 한약방이란 마치 이 동네의 첫인상과 같다고 해도 무방하다. 을지로3가...? 하며 지하철 역을 올라와 더듬 더듬 들어섰던 곳이 한약방이었기 때문이다. 누구나 그렇겠지만 건물과 건물 사이에 위치한 좁디 좁은 길목, 입구에 붙어있는 '이곳은 옛 허준 선생님이 병자들을 치료하시던 혜민서 자리입니다'라는 드라마틱한 문구들은 상당한 센세이션이었다.


당시 뭐든 실제보다 약간 더 과장해 표현하는 버릇이 있어서 머릿 털이 살짝 곤두서게 만드는 멤버가 한 명 있었는데, 가령 그는 이곳에서도 "이야, 내가 시대극 촬영한다면 무조건 여기거든!"이라고 말해 내 몸의 털들을 자극했다. 하지만 한약방 분위기에 대한 그런 표현만큼은 어느 정도 인정할 수밖에 없는 부분이 있다. 고재를 사용해 만든 테이블, 유행을 타지 않는 빈티지한 조명, 실제로 한약방에 가면 볼 수 있는 약재함 등 커피한약방의 모든 공간은 완전히 컨셉츄얼하게 꾸며져 있다. 요즘처럼 업체에서 짜주는 컨셉이 아닌 개인의 취향을 반향해 하나하나 짜넣은 것들이기 때문에 쉽게 흉내낼 수 있는 공간이 아니다. 심지어 1층 한 구석에선 수염을 기른 형이 한 명 앉아서 거의 종일 놋그릇같은 곳에 커피를 로스팅하고 있다. 민속촌, 롯데월드도 울고 갈 하나의 테마파크인 것이다. 이런 공간은 그 공간 자체가 하나의 환대가 된다. 해외에서 처음 을지로 놀러 온 친구가 있다면 어느 카페에 데려가는 게 좋을까. 나 역시 십분의일 운영하던 초창기엔 손님들이 오면 늘 한약방에서 커피를 마셨다.


굳이 아쉬운 점을 짚자면 원두가 대부분 강배전이 많아서 커피가 좀 쓰다는 것이다. 최소 30번 정도는 간 것 같은데 언제부턴가 커피 맛이 약간씩 더 강해지기 시작했다. 어느 날은 유독 써서 함께 갔던 친구에게 괜히 "아니 여기는 한약방이어서 정말 한약이라고 생각하고 내리는 거 아닌가? 허허허" 하며 너스레를 떨기도 했다. 물론 시간이 흐르며 내가 나이가 들었고 신체 기능의 전반적인 것들이 약해지고 있기 때문에 커피가 쓰다고 느낀 것일 수도 있다.


워낙 지역 문화유산화 됐다보니 확장이 쉽지 않겠다는 생각도 든다. 경복궁은 오직 서울 종로구에 있는 경복궁 하나일뿐 갑자기 부산에 똑같은 걸 짓는다고 해서 그게 경복궁이 될 순 없다. 그러고보니 몇해 전 혜화점이 생겼다는 걸 본 것 같아 검색해보니 혜화점과 안암점까지 무려 세 곳이 있다. 역시 남 걱정하는 것만큼 무의미하며 뒷맛이 씁쓸한 게 또 없다. 한약보다 쓴 것 같다. 부디 커피한약방이 서울을 넘어 전국으로 뻗어가길 고대한다.


더불어 십분의일에도 이제 내년이면 10년차니 을지로에서 커피는 한약방, 와인은 십분의일! 같은 구호를 만들어보고 싶다는 생각을 해봤는데 물론 한약방과는 전혀 협의되지 않았음을 밝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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