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해를 마감하며
올해는 이상하게 연말이 연말처럼 느껴지지 않는다. 나만의 기분인가 싶어서 십분의일 다른 직원들에게도 넌지시 물어봤는데, "저도 그런 거 같아요. 왜냐면 맨날 나와서 일만 하니까요."라는 답변이 돌아와 어딘가 숙연해졌다. 이 자리를 빌려 와인 바의 12월을 버텨낸 십분의일 직원들에게 미안함과 감사함을 전하고 싶다.
매일 나와 일을 한 것도 아닌 나는 왜 그런 걸까.
1. 나이가 들었다
2. 캐롤을 평소보다 듣지 않았다
3. 송년회에 거의 나가지 않았다.
어쩌면 셋 다 인 것 같기도 하다. 그러다 문득 떠오른 것이 있다. 미국에 사는 친구의 말.
"미국인들은 축제를 참 좋아하는 것 같아. 10월부터 할로윈을 즐기기 시작해서 할로윈이 끝나면 바로 크리스마스로 넘어간단 말이지." 미국에 몇 번 다녀온 뒤 완전한 사대주의에 빠져 있던 나는 그 말을 듣자 이런 생각이 들었다. '아 이 사람들은 삶에 의미부여를 참 잘하는구나.' 먹고사는 문제를 어느 정도 해결한 사람들은 생존보다는 어떻게 하면 더 잘 살지를 고민한다. 매일, 매년 반복되는 긴 인생을 어떻게 하면 지루하지 않고 재미있게 지낼 수 있을까? 답은 바로 의미부여다. 봄에는 꽃을 심으며 올해는 이런 봄을 지냈다~는 의미부여. 여름엔 산으로 바다로 여름휴가를 다녀오며 더운 여름 잠깐 잘 쉬었다~는 의미부여. 가을엔 이런 축제 저런 축제, 그리고 겨울엔 크리스마스 시즌과 송년회를 즐기며 한 해에 대한 의미를 부여한다. 그렇게 계절을 보내고 제철음식을 해 먹고...
쓰고 보니 그냥 여유 있어서 잘 놀 수 있는 사람들 얘기 아닌가? 싶지만 꼭 그렇지만은 않다. 나 역시도 미국인들의 병적인 홀리데이 사랑에 대해 처음 들었을 땐, '크리스마스나 좀 챙기면 됐지. 10월부터 저렇게 온 동네에 호박을 걸어놓다니 머릿속에 아주 종일 놀 생각뿐이구만!'이라고 되뇌었지만 어쩐지 의무감에 열심히 장식을 하는 동네 할아버지 할머니들을 보며 생각이 바뀌었다. 그렇게라도 매년을 기념하지 않으면 견딜 수가 없게 된 것이다.
내년이면 10년 차에 접어드는 십분의일도 마찬가지다. 같은 일을 반복적으로 하다 보니 그 해가 그 해 갔다. 처음 1,2년은 우리만의 방식으로 1주년 행사도 치르기도 하며 크고 작은 일을 벌였지만 3,4년이 지나고 나니 점점 기계적으로 일상을 보내게 됐다.
아직 먹고 사는 문제가 완전히 해결되진 않은 나와 같은 사람들에겐 가성비 좋은 의미부여가 있다. 바로 연말정산이다. 매년 한 해를 돌아보며 올해 내가... 뭘 했더라...? 를 씹어보는 행위는 그다지 필요 없을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아주 중요한 연말 이벤트다. 잠시 십분의일의 2025년을 돌아본다.
1월
1월엔 마스킹테이프를 만들었다. 성냥, 뱃지에 이은 세 번째 십분의일 공식굿즈였다. 새롭게 십분의일을 시작하며 매년 굿즈 하나씩을 만들어보자고 생각했는데 놀랍게도 거의 매년 그렇게 만들었다. 물론, 거의 판매는 되지 않고 있다. 함께 만든 J가, 이제 굿즈는 그만 만들어도 될 것 같네요...라고 말했다.
2월
오래 일했던 난주가 독일로 교환학생을 떠났다. 재작년 십분의일에서 만든 릴스 대부분에 난주가 등장해서 속으로 십분의일 릴스 여신이라고 생각했는데, 별로 좋아할 것 같은 호칭은 아니어서 그렇게 부르지 않았다. 난주의 추천으로 지금까지 매장에서 일하고 있는 건이가 "난주, 보기보다 참 유쾌한 친구예요"라고 했는데 실제로 난주는 예능감이 풍부한 사람이었다. 난주가 어디서든 행복하길 바란다.
3월
3월엔 벤치를 만들었다. 공원도 아니고 갑자기 웬 벤치냐 싶은데, 그렇게 됐다. 재작년에 가구를 바꾸면서 버리는 의자 몇 개를 아래 내려둔 게 있었는데 완전히 치우고 나니 허전한 마음이 들어 골목에 벤치를 하나 사두기로 했다. 웨이팅 하는 손님들도 앉고 동네 사람들도 필요하면 잠깐 앉아서 쉬면 좋겠다 싶어 만들었는데 정말 다양한 사람들이 벤치에 앉고 있다. 벤치에 앉는 사람들이라는 제목으로 사진전이나 다큐를 만들 수도 있다. 그런 것 치고 아무도 십분의일에서 만든 지 모르는 것 같아 봄이 지나기 전에 스텐실 작업을 했다.
4월
돌이켜보니, 올해는 무언가를 계속 만드는 해였다. 4월엔 접시를 만들었다. 당시 도자 공예에 빠져있던 J가 공방에 의뢰해 십분의일 전용 그릇을 만들었는데 처음에 만들 때는 취미생활을 여기까지 가져오나 싶은 마음이었지만 만들어놓고 보니 퀄리티가 나쁘지 않았다. 리뷰 이벤트에 나가는 바나나 브륄레를 주로 담고 있다.
5월
어느 날 유학 간 난주에게 온 연락. "틴토 데 베라노"라고 아세요? 당연히 몰랐다. 레드와인과 토닉을 섞은 와인 음료인데 유럽에서 많이 마신다고 한다. 이름이 좀 낯설어서 걱정했는데 굉장히 잘 팔렸다. 역시 사람은 계속 배워야 되는구나 싶다.
6-8월
특별히 회고할 건 없고 '혼술메뉴판'이라는 것을 만들었다. 말 그대로 혼자 오는 손님들을 위한 메뉴판. 안주 몇 가지의 사이즈를 절반으로 줄이고 가격도 낮췄다. 의외로 십분의일엔 혼자 오는 분들이 많다. 그들을 위한 작은 배려.
9월
- 스피커 앰프, 그리고 작은 냉난방기 하나를 교체했다. 작년에도 여러 기기를 교체했는데 올해는 크게 이 두 가지를 갈아꼈다. 바꿀 때마다 새삼 여기가 오래되긴 했구나 싶다. 사람도 그렇지만 공간 역시 끊임없이 손을 대줘야 한다. 내년에도 또 무엇이 바뀔까.
- 오래전 십분의일 직원이었던 현승이가 자신의 가게를 오픈했다. 이름은 박학다식. 익선동에 있다. 그러고 보니 올해 안에 갈게! 하고 아직 가보질 못했다. 설 전에는 꼭 한 번 가봐야겠다.
10월
바쁜 주말을 담당해 온 현지가 떠났다. 서울 밖으로 이사를 하게 되면서 출퇴근이 어려워졌다고 한다. 현지의 꿈은 연극연출가였다. 현지가 참여한 연극을 보러 간 적도 있다. 조금 난해했지만 와인 바의 의리로 끝까지 앉아 열심히 박수를 쳤다. 현지가 꿈을 이뤘으면 좋겠다. 현지가 떠난 자리엔 새로운 멤버 소진씨가 들어왔다. 언젠가 현지를 불렀던 것처럼 소진아..라고 부를 수 있는 날이 올까?
11-12월
- 크리스마스 트리를 복원했다. 옛날에 핀터레스트를 보고 혼자 톱으로 만들었던 전설의 트리. 개인적으로 거의 10년 만에 그 작업을 했는데 당시엔 레고를 조립하는 아이의 마음이었다면, 지금은 아이들에게 레고를 선물해 주는 아빠의 마음으로 트리를 만들었다.
- 복호두와의 콜라보. 올해는 촬영 대관 등 외부와의 소통이 거의 없어 아쉬웠는데 12월에 복호두와 함께 레드벨벳 크림치즈 호두과자를 판매하게 됐다. 동네별로 몇 개의 바를 섭외해 한정적으로 판매하는 것 같은데 을지로에서는 몇몇 가게들과 함께 십분의일이 선정됐다. 외식업도 일종의 서비스업. 사람들에게 잊히는 것이 두렵고 잊지 않고 찾아주는 사람들이 늘 감사하다. 십분의일에 오셨던 분들, 아직 잊지 않으신 분들 모두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