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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모호연 Jul 04. 2022

당근 토마토 파스타

익힌 당근이 좋아지는 맛


당근은 다양한 음식에서 맛을 보조하면서도 주인공이 되지 못하는 채소다. 스튜나 카레를 끓일 때에도 국물 맛을 내는 데 적잖은 공을 세우지만 막상 음식을 내면 먹지 않고 남겨지는 경우가 많다. 카레 속 당근은 정말 애매한 존재다. 감자처럼 포슬거리지도 않고 씹으면 이 사이로 뭉근히 무너지는데, 그 덩어리는 생당근이 지니고 있던 진한 맛과 향이 다 달아나 '이도 저도 아닌' 밍밍한 인상을 준다. 이러한 경험 때문에 사람들은 스스로 당근을 싫어한다고 믿게 되지만 의외로 생당근은 맛있게 잘 먹는 경우가 많다. 생당근은 조리하면서 맛이 빠지지 않은 달달하고 산뜻한 본래 당근의 맛이니까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최근 SNS에서 '당근 라페(당근 절임)'나 '당근 뢰스티(당근을 채 썰어 부친 전)'가 유행하면서 당근이 요리의 주재료로 새롭게 부각되고 있다. '당근이 이런 맛이라니, 놀랐다'는 평이 대부분이다. 그래, 당근도 이제 오해를 벗고 주인공을 맡을 때가 됐지. 한 때 우리 집에서는 러시아식 당근 김치가 유행했는데, 진한 마늘향이 일품인 이 음식도 당근을 주인공으로 하는 음식의 선두주자가 될 만하다. 다만 이것은 '반찬'의 기능을 하는 것이라 빵과 같이 곁들일 음식이 필요한데, 단품 요리이면서 당근이 주재료인 우리 집의 또 다른 특식을 얘기하자면 고민할 것 없이 '당근 토마토 파스타'가 1순위를 차지할 것이다. 


당근 토마토 파스타는 채 썬 당근을 볶아 토마토소스와 섞는 아주 간단한 음식이다. 언젠가 친구 집에서 얻어먹고는 의외의 맛에 감동을 받아 기억해 두고 있었다. 토마토소스와 색이 비슷해 겉보기에 특별한 느낌은 들지 않지만 한 입 먹고 나면 '그래 봤자 당근이지'라는 생각이 쏙 들어간다. 그날의 파스타를 잊지 못해 종종 당근을 넣은 토마토 파스타를 해 먹는다. 언제나 냉장고에 들어 있는 값싸고 흔한 채소로 '특식' 기분을 낼 수 있으니 일석이조다. 


당근 토마토 파스타에 들어가는 당근은 파스타보다 조금 짧은 길이로 얇게 채 썬다. 나는 당근 김치를 담글 때 썼던 채칼로 슥슥 당근을 벗겨낸 뒤 먹기 좋은 길이로 다시 썰어주었다. 달군 팬에 올리브유를 넉넉히 두르고 마늘과 당근을 볶는다. 마늘은 금방 타고 당근은 익는 데 오래 걸리니까 처음부터 같이 넣어도 좋다. 바로 옆에는 파스타를 삶는 냄비가 올려져 있다. 소금을 한 주먹 넣어 간이 된 물은 끓을수록 파스타의 전분이 우러나 뽀얘지는데 이것을 면수라고 한다. 반쯤 익은 당근에 면수를 한두 국자 부어서 익혀주면 소금물의 간이 당근에 배면서 부드럽게 익는다. 당근이 익으면 냉장고에 남아 있던 토마토소스를 쏟아 넣고 냉장고 안에서 생긴 물이 증발할 만큼만 간단히 끓인다. 건져낸 파스타에 올리브유를 칙칙 뿌려서 위에 소스와 갈아낸 치즈와 후추를 올리면 이 요리는 완성이다. 


토독토독 잘근잘근 씹히는 그 식감은 평소에 저어하던 익힌 당근의 그것이 아니다. 익힌 당근을 좋아하지 않는 나와 동거인도 이 음식만큼은 내내 즐기면서 먹는다. 은은하면서도 존재감 있는 단맛이 토마토소스의 새콤한 맛과 잘 어우러진다. 그동안 꽤 만들어 먹었는데도 이 새로움에 익숙해지지 않아서 먹을 때마다 내가 먹어보지 못한 재료를 시험하는 느낌이다. 한 마디로 질리지 않았다는 말이다. 


오래가는 채소일수록 안심하고 내버려 두게 되니 가장 맛있을 때를 놓치기 쉽지만 이번에 산 당근은 오래 두지 않고 즙이 많을 때 썰어서 파스타로 만들어야겠다. 다음에는 토마토를 넣지 않고 채 썬 당근만 잔뜩 익혀서 알리오 올리오에 얹어 볼까. 그건 또 색다른 맛이겠지. 익숙한 먹이의 다른 면모를 알게 되는 것은 늘 기쁜 일이다. 앞으로도 내가 모르던 당근의 맛을 새롭게 알아갈 작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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