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01. 스케치에서 양산까지, 산업디자이너로서의 시작

끊임없는 적응과 10년 주기 리셋: 해외에서 살아간다는 것

by moin


1부. 첫번째 리셋 - 사양산업과의 이별





손끝에서 시작되는 문제해결

어릴 때 내 손은 늘 바빴다. 종이를 접어 구조물을 만들고, 모형을 조립하며 작은 디테일까지 신경 쓰는 과정이 재미있었다. 단순히 설명서를 따라 만드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재료를 바꿔보거나 색을 다르게 칠하며 나만의 방식으로 변형하는 데 흥미를 느꼈다. 완성된 결과물보다 만들어가는 과정이 더 짜릿하게 느껴졌다.

자연스럽게 디자인에 관심을 갖게 되었고, 결국 산업디자인을 전공했다. 단순히 멋진 제품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어떻게 제품을 사용하고 어떤 불편함을 겪는지 분석하며 더 나은 해결책을 찾고 싶었다. 대학에서는 디자인을 단순한 외형이 아닌, 기능과 경험을 개선하는 도구로 접근했다. 사용자의 행동을 관찰하고 기록하며 문제점을 파악했고, 기능적 해결책을 넘어 미적 감각을 더해 제품의 외형과 솔루션이 자연스럽게 결합되도록 고민했다. 형태와 기능이 균형을 이루는 디자인을 만들기 위해 스케치와 모델링을 반복했고, 이를 통해 제품이 더욱 직관적이고 조화롭게 다가갈 수 있도록 설계했다.


여러 프로젝트를 수행하면서 시행착오도 많았지만, 그 과정에서 성장했다. 다수의 공신력있는 국제 디자인 공모전에서 수상하며 자신감을 얻었고, 디자인이 단순한 형태의 문제가 아니라 기능과 경험, 그리고 사회적 가치까지 포함하는 것임을 깨닫게 되었다. 디자인을 통해 세상과 소통할 수 있다는 사실이 점점 더 확신으로 바뀌었다.




기능과 미학의 균형 잡기

졸업 후, 한 회사에 산업디자이너로 취업했다. 내 역할은 단순히 제품을 보기 좋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클라이언트의 요구와 회사의 방향을 이해하고, 사용자의 편의를 극대화 하는 동시에 기능성과 심미성을 균형 있게 조화시키는 일이었다. 초기 기획부터 스케치, 시제품 제작, 양산 단계까지 전 과정을 경험하면서, 산업디자인이 단순히 '예쁜 디자인'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디자인은 사용자의 행동을 변화시키고, 제품의 경쟁력을 좌우하며, 기업의 비즈니스 전략과도 맞닿아 있었다.




스케치에서 현실로, 손끝에서 세상으로 번지는 디자인

새로운 프로젝트를 맡을 때마다 도전이 즐거웠다. 관련 부서들과 기획회의를 하고, 스케치를 통해 아이디어를 발전시키고, 3D 모델링, 렌더링을 하면서 디자인을 구체화하는 과정이 흥미로웠다.

하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성취감을 느꼈던 순간은 내가 디자인한 제품이 실제로 생산되어 누군가의 일상에 자연스럽게 녹아드는 장면을 마주할 때였다. 처음 종이에 그린 작은 스케치가 현실이 되어 사람들의 손에 쥐어지고, 그들의 삶 속에서 쓰이는 모습을 볼 때면, 단순한 창작을 넘어 세상과 연결되는 기분이 들었다. 이 길에서 꾸준히 성장할 자신이 있었고, 내 역량을 쌓아가면서 더 나은 디자이너가 될 것이라고 믿었다.




변화하는 시장, 커지는 불안감

"이 파트, 그대로 재사용할 수 없을까?"

어느순간부터 기획 회의에서 점점 더 자주 들리는 말이었다. 새로운 부품을 설계하는 대신, 이미 있는 부품들을 최대한 활용해 다른 인상을 주는 것이 주요 업무가 되었다. 원가 절감이 가장 중요한 목표가 되었고, 새로운 시도를 하기보다 제한된 요소 안에서 변화를 주는 일이 더 요구되었다.

처음에는 단순한 우려일 뿐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런 프로젝트가 하나둘 늘어나더니, 어느새 당연한 흐름이 되어버렸다.


처음 제품 디자이너가 되었을 때, 내 역할은 소비자의 경험을 개선하는 것이었다. 더 편리한 형태, 더 효율적인 기능, 더 아름다운 디자인을 고민했다. 하지만 점점 프로젝트의 방향은 달라졌다. 새로움을 만들어내기보다, 주어진 자원 안에서 가장 비용 효율적인 선택을 하는 것이 더 중요해졌다. 이렇게 프로젝트의 방향이 바뀌기 시작했고, 디자이너의 역할도 점차 변해갔다.




10년 후, 산업디자인의 수요는 어떻게 될까?

그리고 디자이너들의 작업과 산업의 구조를 송두리째 바꿔놓은 충격이 찾아왔다. 아이폰의 등장. 어제까지 필수품이었던 장치들이 오늘은 하나의 앱으로 대체되었다. MP3 플레이어, 카메라, 내비게이션은 이제 모두 스마트폰 안에 갇혀버렸다. 디자인의 무대가 물리적 공간에서 디지털 세계로 급격히 이동하는 것을 목격했다. 트렌드에도 관련 용어들이 가득했다. "UX", "UI", "사용자 여정"... 이 단어들이 산업디자인 전문 용어였던 "곡면", "질감", "인체공학"을 밀어내고 있었다.

처음에는 단순한 호기심으로 시작한 질문이 이제는 밤마다 나를 괴롭혔다. "앞으로 내가 디자인할 세상은 어디에 있을까?" 프로젝트들은 점점 더 비슷해졌고, 디자인의 목소리는 점점 더 작아졌다. 새로운 가능성을 탐색하기보다는 익숙한 것을 조금만 바꾸는 '안전한' 접근이 선호되었다.

한때 확고했던 내 직업적 정체성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디자인은 여전히 중요했지만, 그 의미는 내가 꿈꾸던 것과 달라지고 있었다.




새로운 길을 고민하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나는 점점 더 많은 고민을 하게 되었다. 주변 동료들도 하나둘씩 업계를 떠나거나 새로운 길을 모색하고 있었다. 일부는 UX/UI 디자인으로 전향했고, 일부는 기획이나 마케팅으로 방향을 바꾸었다. 한때 안정적이라고 생각했던 산업디자인이라는 직업이 더 이상 확실한 미래를 보장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나는 변화의 흐름을 읽으며, 다른 선택지를 고민하기 시작했다. 디자인이라는 본질은 변하지 않지만, 산업의 흐름은 내가 통제할 수 없는 영역이었다. 내가 지금까지 해왔던 일이 의미가 없어진 것은 아니지만, 앞으로도 지속할 수 있을지에 대한 확신은 점점 흐려졌다.


그렇다면 나는 앞으로 무엇을 해야 할까?

지금까지 쌓아온 경험을 살려 새로운 분야로 확장할 수 있을까?

아니면 완전히 새로운 길을 찾아야 할까?

이 질문들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그렇게, 나는 첫 번째 리셋 버튼을 누르기로 결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