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3월 18일 수요일

by 모조

열여덟 번째 날이다, 조카님과 함께 하는 두 번째 날.


7시가 되자 잠에서 깨 몸을 세우고 앉았다. 중간에 몇 번 잠에서 깨 칭얼댔다. 여행을 떠나 잠드는 건 처음이라 그런지 푹 잠들지 못한 건 아닐까 걱정이다.


끼니를 거르면 안 되기에 아침밥을 먼저 챙겨줬다. 어른들은 돌아가며 아이를 보면서 가볍게 아침을 챙겨 먹었다. 컨디션이 좋아 보여 다 같이 동네 산책을 나섰다. 영국찻집이 쉬는 날인 건 알고 있었지만, 앞에서 사진이라도 찍어줄 생각으로 들렀는데 입구를 막아두실 거라곤 생각 못했다. 어찌 보면 매우 당연한 건데. 어쩔 수 없이 아쉬움을 뒤로한 채 봉성리에 있는 카페들을 경유지로 삼아 동네 산책을 한 바퀴 돌았다. 영국찻집-바람우표-봉성프리마. 햇살도 좋고, 함께 하는 사람들도 있으니 산책길이 더 행복하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 돌담에 그러진 형형색색의 그림에 조카님이 관심을 보여 봉성리봄에 잠깐 들렀다. 앞에서 사진을 찍다 사장님과 조우해 인사도 나눴다. 가게 사장님 아이의 이름과 조카님의 이름이 매우 비슷했다. 획 하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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낮잠을 주무시는 시간에 맞춰 오름에 올랐다. 날도 좋고, 아침부터 조카님을 봐서 기분도 좋아서인지 오름 풍경이 더 아름답게 느껴진다. 산책 중에 만난 어르신들과 가볍게 인사를 나누고 평소에는 가보지 않았던 산책로까지 탐방(?)하고 집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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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량제 봉투는 묶음 단위로만 판매하는 줄 알았는데…… 낱개로도 살 수 있는 거면 조금만 살 걸… 내 돈…


어젯밤부터 동생이 고기국수가 먹고 싶다고 해서 근처에 있는 국시집을 찾았다. 잘 알려진 고기 국숫집은 아니었다. 전통적(?), 혹은 잘 알려진 고기국수의 맛은 아니었지만 생면이 맛있어 배부르게 먹었던 것 같다.


하늘도 맑고 어제보다 바람도 많이 불지 않는 것 같아 협재 해수욕장으로 갔다. 어제는 해변을 걷지도 못했다고 하니, 조금 더 가까이서 바다를 보여주고 싶었다. 곽지도 그렇지만 협재도 워낙 물이 맑고 얕은 구간이 많아 어린이들도 놀기 좋은 가족 해수욕장으로 유명하기 때문에 좋을 것 같았다. 바닷가다 보니 생각한 것보다 바람이 많이 불긴 했지만 바다를 즐기기 힘든 정도는 아니라 제대로 바다 구경을 시켜줄 수 있었다. 바닷물에 손도 담가 보고, 엄마 아빠랑 사진도 찍고, 파도도 구경하고, 바닷바람도 맞아보고. 중간에 어른들의 사진 욕심 때문에 젖은 모래 위에 앉느라 바지가 다 젖어 불편한 순간도 있었는데, 잠깐 칭얼대긴 해도 투정조차 부리지 않는다. 너무나도 고맙게도, 그렇게 밝게 웃고, 걷고, 즐거워하는 모습을 가득 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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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 협재 해변을 볼 수 있는 스타벅스가 있었다. 친구들한테 받은 제주 전용 음료도 맛보고, 조카님 기저귀도 갈고, 바람을 피해 편하게 바다도 즐기고. 어릴 때부터 조기교육(?)을 시킨 덕분인지, 편안하게 잘 머물렀다.


꼭 같이 가야지 생각했던 명월국민학교에 같이 왔다. 조금 늦은 시간에 간 탓에 바람이 거샌 탓에 원래 계획했던 비눗방울 놀이는 같이 못했다. 그래도 내일 마당에서 해주려고 하나 챙겨두긴 했다. 대신 마침, 예전부터 한 번 사주려고 했던, 바람개비가 있어 손에 쥐어줬는데, 정말 너무 좋아한다. 잔디밭에 앉아 바람개비가 돌아가는 걸 보며 어찌나 환하게 웃는지, 아가가 즐거워하는 만큼 우리의 웃음소리도 점점 더 커졌다. 걸어 다닐 수 있을 때 왔으면 더 좋아했을 것 같은데, 다음에 또 같이 오면 되니까. 그때는 비눗방울 놀이도 하고, 공놀이도 하고, 연날리기도 같이 해줄 수 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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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정이 조금씩 밀리다 보니 급하게 저녁 장소를 찾아야 했다. 게다가 15분 내에 이동할 수 있는 곳 중에 늦게까지 영업하는 곳을 찾으려니 쉽지 않았다. 그러다 우연히 발견한 ‘애월리안’. 애매한 해물뚝배기집에 가는 것보다는 훨씬 좋은 선택이었던 것 같다. 스튜도 라자냐도 빵도 수준급이었다. 매부 말대로 지불한 값이 아깝지 않은 곳이었다. 별거 아니지만, 이렇게 계획대로 진행되지 않을 때 우연히 발견하는 장소에서 만족스러운 경험을 하는 것도 여행의 즐거움 중 하나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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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월리안 쉬림프 망고 샐러드, 해산물 스튜, 라자냐.

마침 어촌계가 근처에 있어 회를 떠 집으로 가져갔다. 가게에서도 인기 만점이다. 수족관에 있는 물고기들을 보고 연신 '우와'하며 감탄사를 내뱉는다. 여기 와서 짹짹이들은 많이 만났는데 구피 친구들은 처음 보는지라 얼마나 좋아하던지.


집으로 오는 길, 아가가 무척이나 울었다. 기저귀도 불편하고 졸렸나 보다. 이동 중이라 그저 달래는 수밖에 없는 데, 차 안에 있는 어른 셋 모두 발만 동동 구르며 울음소리를 듣는 게 쉬운 일이 아니더라. 어르고 달래고 집에 도착하자마자 불편해했던 기저귀를 갈아주고, 옷도 편하게 갈아 입혀주니 금세 그치고 또 밝게 웃는다.


분명히 졸려서 울었던 아가가 늦게까지 잠들지 않았다. 바로 옆방이다 보니 미닫이 문을 열면 아가가 자는 방과 연결이 되는데, 침대 매트가 낮아 아가가 곧장 기어 올라왔다. 핸드폰 불빛을 본 탓이다. 핸드폰 불빛을 본 김에 아예 같이 누워 카메라에 담긴 아가 영상들을 보여줬다.(동생한테 혼날 거 같은데...) 앞마당을 엄마 손 잡고 도는 영상, 바닷가에서 바닷물에 손을 담그는 영상, 잔디밭에 앉아 바람개비를 보며 좋아하는 영상. 제주에 머무는 동안에 함께 했던 추억들을 같이 나눴다. 자기가 나오는 영상인걸 아는지 가만히 옆에 누워 있더라. 고작 2~3분 되는 시간이었는데, 그렇게 얌전히 누워 영상을 보는 아가와 함께 있는 순간이 지금껏 제주에 머물며 기억하고 추억할만한 순간들 중에서도 가낭 행복한 순간이었다. 그 따듯함, 보드라움. 둘이 잠깐 정신과 시간의 방에 들어갔다 나온 것 같았다. 아마, 그 순간을 기억하는 건 평생 나 하나뿐이겠지만, 그래서 더 귀하고 감사한 시간이었다. 이렇게 조카님네와 함께하는 마지막 밤이 깊어간다.


조카님을 재우고, 횟집에서 모셔온 도미 회와 함께 이런저런 담소를 나눴다. 동생이랑 이렇게 대화를 나눈 것도 엄청 오랜만이다. 매부와도. 서로 고민하는 것도 비슷하다 보니 시간 가는 줄 모르고 한참을 떠들었다. 오랜만에 가슴속에 있던 이야기들을 나눈 시간, 더 자주 이런 시간들이 많아졌으면 좋겠다. 한 가족으로 한 걸음 더 나아가는 시간들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