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무 번째 날, 루틴을 다시 잡기 위해, 이벤트가 있기 이전의 일상으로 돌아가기 위한 하루를 살았다. 근데 이전과 조금 다른 일상이 시작됐다.
제주에 와서 처음으로 야식을 먹었던 탓인지 속이 쓰려 일찍 잠에서 깼다. 일찍 일어난 김에 오름이나 다녀올까 하다 그냥 침대에서 조금 더 뒹굴거리기로 했다. 침대에서 잠시 멍 때리다 핸드폰으로 날짜를 확인하고서 급하게 스위치를 꺼내 들었다. 드디어 그 날이다. 스위치에서 <모여봐요, 동물의 숲> 플레이할 수 있는 날.
<동물의 숲> 시리즈는 처음이다. 솔직히 이런 게임이 있는지도 몰랐다. 2년 전인가, 회사에서 멘토님과 후배님이 이 게임에 대해 얘기를 나눌 때 처음 들었던 것 같다. 그러다 이번에 스위치용 패키지 출시 소식이 나온 후부터 회사 후배가 워낙 들떠 있는 걸 보니 흥미가 생겼다. 후배님이 공유해준 게임 설명이랑 디렉트 영상을 보니 지금까지 플레이했던 게임과는 다르지만, 이번 한달살이 콘셉트랑 엄청 잘 어울리는 것 같았다. 살까 말까 고민하다(3월 20일엔 닌텐도 샵에 갈 수가 없으니...) 그날 밤 바로 디지털 패키지를 다운 받았다. 그리고 시간이 흐르고 흘러 드디어 게임을 플레이할 수 있게 됐다.
그리고 잠시 후, 섬 이름을 제주도로 할까 말까 엄청 고민했는데, '왓섬'의 주민대표 '모조'가 탄생했다. 일단 텐트 치고... 원숭이인지 고릴라인지 모르는 운동광과 빨간 눈의 소와 함께 무인도 생활을 시작. 고작 텐트 치고 인사만 나눴을 뿐인데 배가 고파졌다. 일단 밥 먹고 나서 본격적으로 해보는 걸로.
메종 드 쁘띠뿌르의 시그니처라고 알려진 고베식빵으로 토스트를 했다. 이그니 버터를 살짝 바르고, 발뮤다 토스터에 토스터 모드로 4분(인 건지 단계인 건지..). 스크램블드 에그(는 오늘따라 노른자 색이 더 예쁘더라)도 성공적이었다. 플레이팅도 나름 성공적으로 잘 끝냈는데, 식빵이 너무 커서 영 안 예쁘다. 이제 식빵은 하나만 해도 될 것 같다. 고베 식빵은 막 어마 무시하게 맛있는지는 모르겠는데, 먹을 때는 그랬는데, 계속 생각나네.
오랜만에 폴딩 도어와 창문을 전부 열었다. 햇살 또 따듯하게 내려오고, 바람도 살랑살랑 불어온다. 집 안에서 바라본 제주의 날씨는 완연한 봄 날씨 같았다. 밖에 나가면 또 다를지 모르겠지만, 제주에 온 이후로 종종 맞이하는, 집에서 멍하니 앉아 있기만 해도 행복한 날이 또 한 번 왔구나 싶다.
음악을 평소보다 조금 더 크게 틀고(the weeknd, Kendrick Lamar, Charlie Puth의 Apple Music essential list), 청소도 하고, 빨래도 돌렸다. 조카님의 안전을 위해 치워 뒀던 인테리어 소품들과 집기들도 다시 전진 배치했다. 셋째 날이었나, 어느 정도 내 집처럼 느껴지게 꾸몄던 그 날처럼 다시 한번 구역별로 역할을 나누고 개인 물품들을 정해진 위치에 놓았다. 책과 옷이 좀 늘었고, 주방에서 쓰는 집기들도 조금 더 늘었다. 지금까지 그냥 매일 같은 일상을 살아왔다 생각했는데, 어느새 유형의 물건들도, 무형의 추억들도 겹겹이 쌓여있었다. 꼭 큰 이벤트나 경험만이 삶을 풍요롭게 하는 건 아니었다. 이렇게, 평범한 일상을 살아가더라도, 눈에 보이지 않더라도, 하루하루 쌓여가는 게 있다. 오늘 하루가 특별하지 않았더라도, 하루를 오롯이 살았다면 어제보다 조금 더 풍성한 사람이, 삶이 된다는 건 무척 의미 있는 일이 아닐까.
스파게티를 사두고는 한 번도 해 먹질 않았다. 마침 냉장고에 만들도 있겠다, 좋은 올리브유도 사뒀겠다, 친구들이 사다준 파마산 치즈도 있겠다, 청양고추를 넣어서 알리오 올리오를 만들어 먹었다. 매일 어머니께 손이 크시다고, 뭐 할 때 조금만 하시라고 말씀드리는데, 이건 유전인가 보다. 분명히 1인분을 만든다고 만든 건데, 차려 놓고 보니 2인분은 되는 듯하다. 마늘이 조금 타고, 청양고추의 매운맛이 너무 베어 아쉽긴 했지만, 올리브 오일이 다 살렸다. 배부르게 잘 먹었다.
날이 무척 맑은 덕에 오름에서 바라보는 풍경이 한층 아름다웠다. 점심을 워낙 많이 먹은 탓에 페이스가 조금 늦었지만 몸이 풀린 김에 평소보다 두 세 바퀴 더 돌고 내려왔다. 날이 좋으니 힘이 저절로 더 나는 듯하다.
아무래도 마음이 허하긴 한가보다. 계속 먹을 것만 생각난다. 점심 많이 먹은 후에 더부룩해서 오름을 그렇게 돌았는데, 다 돌고 내려오다 보니 또 무언가를 계속 먹어서 배를 꽉 채우고 싶어 진다. 이미 대식의 날이 된 김에 제대로 한 번 먹어보자며 길에 주물럭을 해먹을 고기를 한 덩이 사 왔다. 냉장고를 보니 계란도 넉넉하게 있더라. 거하게 저녁을 한 상 차리려면 요리를 해야 했기에 하는 김에 밑반찬도 해둬야겠다는 생각에 장조림을 먼저 만들었다. 이번에 배운 건, 장조림은 달달하니 맛있는 향이 날 때 불을 꺼야 한다는 거다. 그때 껐으면 더 좋았을 텐데, 너무 졸였다. 그래도 비주얼이 나쁘질 않다. 계란장보다는 오래 보관할 수 있으니 찬찬히 두고 먹어야겠다. 하루에 한 개씩 먹으면 딱 맞을 듯.
고춧가루가 없어 조금 걱정했는데 주물럭 양념도 생각보다 잘 됐다. 약간 교환학생 시절에 마트에서 제일 싼 돼지고기 사다가 해 먹었던 주물럭의 맛이 난다. 추억의 맛. 이거 그때도 꽤 인기 메뉴였다. 파티 때나 친구들이랑 집에서 밥 먹을 때 하면 다들 좋아했었다. 하다 보니 또 한 가족이 먹어도 될 만큼의 양을 했건만, 너무 맛있어서 다 먹었다. 진짜 배가 터지도록 먹었다.
오랜만에 집에 오래 머물러서 그런지, 혼자 있어서 그런지 모르겠지만 이런저런 생각도 많이 들고, 지금 머물고 있는 집도 구석구석 둘러보게 된다. 아마 가장 큰 이벤트를 치른 뒤다 보니 느껴지는 허함을 다른 걸로 달래기 위해 끊임없이 채울 것을 찾는 탓이 아닐까 싶다. 매일 바라봤던 정원도 유독 아름다워 보인다. 분명히 한 밤이건만 하늘이 푸르다. 푸른 밤하늘 아래 따듯한 조명이 더해지니 한 없이 아름답다. 다시 루틴을 찾겠다고 이렇게 저렇게 지내봤지만, 그게 다 무슨 소용인가 싶다. 그냥 이렇게 매 순간순간에 더 행복할 수 있게 살아가면 어떤가 싶다. 이렇게 한참 궁상맞게 빈둥거리다 현재에 더 집중하자며 벌떡 일어나 스위치를 집으러 갔다.
낮에 나오는 벌레랑 밤에 나오는 벌레가 다르다. 물고기도 다른 게 잡힌다. 바람도, 파도도, 하늘도, 별빛도, 엄청 아름답네. '모여봐요, 동물의 숲', 이거 물건이네. 또 시간 사라져 버렸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