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무한 번째 날, 하루를 관통하는 키워드는 '간절함'.
새로운 친구들이 오기 전에 냉장고를 다 비워야겠다. 조카님 간식으로 가져온 치즈나 두부, 이유식, 된장국 등등이 냉장고에 남아 있었다. 거기에 어제 밑반찬을 만들고 남은 소시지도 있고, 게란도 많이 남았다. 1인 1 주문을 지키려고 명월국민학교에서 샀던 사과주스도 있고, 슬슬 생기를 잃어 가는 대추 방울토마토와 포도도 있다. 김치도 조금 남아 있네. 아침과 점심에 나눠 하나하나 처리해야겠다.
일단 아침에는 남아있던 유기농 치즈와 비엔나소시지, 포도, 사과주스를 이용해 아침을 차렸다. 커피를 안 내리긴 처음인 것 같네. 점심에 뽀로로 연두부와 방울토마토 계란 볶음까지 먹고 나니 냉장고가 다시 가벼워지면서 마음이 조금 더 편해졌다.
오랜만에 게임에 푹 빠졌다. 마침 또 제주도에 혼자 쉬고 있다 보니 무인도에 놀러 가는 캐릭터와 하나가 된 것 마냥 감정 이입해서 최선을 다하고 있다. 폴딩도어랑 창문 다 열고, 노래 틀어 놓고 거실에 누워 게임을 하면 무릉도원이 따로 없다. 주민들을 사냥(?)하는 것도 아니고, 레벨이 오르는 것도 아닌데 왜 하는 거냐고 했었는데, 이제는 그래서 더 하고 싶어 진다. 사람 마음이라는 게 이렇다. 특별히 뭐 하는 것도 없는데 마냥 좋다. 시간이 진짜 살살 녹는다.
오늘부터 2박 동안 머물 친구들이 공항에서 출발한다고 연락이 왔다. 한 명은 대학생 때부터 알고 지내온 동생이고, 다른 한 명은 작년에 부산국제영화제 기간에 만난 친구였다. 그때 점심 같이 먹고 커피 한 잔 하고 나서 서울에서 한 번 밥 먹자며 헤어졌는데, 서울이 아니라 제주에서 밥을 먹게 됐다. 그래도 이렇게 기회가 돼서 또 만난다고 하니 반갑고 고맙다. 오기 쉬운 길은 아니었을 텐데. 아무튼 친구들은 제주에 도착해 여행을 하고 저녁 시간에 맞춰서 온다고 했으니 시간을 맞춰 준비하기 위해 스위치를 내려놓고 오름으로 향했다.
오름에 다녀온 후, 햇빛에 말려둔 침구류를 거두고 필로우 미스트도 뿌려 뒀다. 하이볼 재료들을 사 오신다는 말에 얼음들도 미리 좀 준비했다. 그리고 또다시 동물의 숲 좀 하고 있다 보니 어도초등학교에 도착했다고 연락이 왔다. 마중을 나가 주차안내(?)를 하고 에스코트해서 집으로 모셔왔다. 다행히 집에 꽤 맘에 드신 듯하다.
저녁에 같이 먹기로 한 숙성고등어회가 '배달'이 된다다. 제주집에서 처음으로 '배달음식'을 먹는 날이다. 아니, 이게 배달이 된다고...? 가게 주인아저씨가 이 동네 사시는 건가..? 아무튼, 친구들이 배고픔에 지쳐 조금씩 날카로워질 때쯤(ㅋㅋㅋ) 고등어회가 도착했다. 딱새우 대신에 고등어회를 더 주셨다는데, 배 터지게 먹었다. 깻잎에 김 깔고, 알밥 올리고, 고등어회 얹고, 양파절임 얹고, 잘 싸서 먹으면 진짜 술술 들어간다. 고등어회만 따로 먹어도 생고등어회보다 덜 비리고 먹을만하다. 셋 다 술을 달리는 편이 아니라 얼마나 다행인지, 이거 술이랑 먹으면 진짜 술을 물 먹듯 마실 수 있을 것만 같다.
어쩌다 보니, 저녁 내내 나누었던 대화는 다 잊히고, '간절함'이라는 단어 하나만 남았다. 대화 주제는 꽤 다양했던 것 같은데, 남은 건 '간절함' 뿐이다. '간절함'이라는 개념 자체를 잃어버린 채 살아온 지 꽤 된 것 같다. 흔히들 말하는 번아웃이겠지. 거기에 미래가 점점 더 나아질 것 같다는 막연한 희망마저도 어릴 때나 부리는 객기 같은 거라는 생각이 끼어든 순간부터였던 것 같다. 그때부터, 간절히 무언가를 원하고, 바라고, 성취하고자 했던 적이 없는 것 같다. 그랬다, 사실 제주로 한 달 도망치듯 온 것도 이 때문이었다. 이게 문제라는 걸 알기에 조금이라도 더 간절한 것들을 고민하고 찾아보기 위해. 대화의 끝자락쯤, 이러한 생각에 다다랐을 때부터, 한참을 멍하니 그 말을 곱씹었던 것 같다. 지금도 계속 그런 상태고. 그래도, 그게 뭔지 모르겠지만 간절하게 이루고 싶은 무언가 하나하나 찾아서 이루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 걸 보면, 아직 늦지는 않았나 보다. 옛날부터 잘 해왔던 것처럼, 자그마한 것들부터라도 하나하나, 해나가면서 조금씩 더 간절히 바라는 것을 이루기 위해 간절히 진심을 담아 노력해볼 때가 오고 있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