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위로 올라간 왕
중세 유럽 사람들은 도시의 부를 자랑함과 동시에 예수님(천국)에게 가까이 가기 위해 교회 건물을 높게 높게 지었다. 그래서인지 유럽을 여행하다 보면 도시마다 거대한 두오모가 도시의 중심에 자리잡고 있다.
가야 사람들은 자신의 나라를 건국한 사람들이 하늘에서 내려왔다고 믿었고, 그래서 건국신화에서도 하늘에서 알이 내려온다. 그래서일까 가야의 왕과 귀족들은 죽으면 하늘 가까이 가고 싶어서 무덤들을 산에다 만들었다. 신라 왕과 귀족들의 무덤은 우리가 알다시피 경주평야에 있다. 그러나 가야 무덤들은 평지가 아닌 언덕이나 산에 있다. 그 덕분에 가야의 무덤을 만나기 위해서는 등산을 해야 할 때가 있다.
우리가 흔히 대가야라고 부르는 가야는 지금의 고령군에 있는데, 역시나 무덤들은 산에 있다. 박물관 뒷쪽의 산에는 온통 무덤이다. 애시당초 무덤을 만들기 위해 산을 만들어 놓은 듯 하다.
박물관에서 보면 그리 많아 보이거나 커 보이지는 않았다. 나는 박물관을 지나기 전 우측으로 난 산길을 들머리로 선택하고 무덤 답사를 시작했다. 산너머 계곡을 건너는 곳에도 무덤이 자리잡고 있었다. 이 무덤들을 샅샅이 답사하겠다는 마음은 일찌감치 접고 큰 길을 따라 천천히 산 위를 올랐다. 무덤 앞에는 검은색 이름표를 달고 있었다. 무덤이 주는 상징성과 교과서에서 다루는 비중에 비해 무덤군을 정비하는 것은 다소 늦은 듯 보였다. 이렇게라도 대접받는 것도 행운이라고 봐야 하는 건가?
예상보다 가파른 산길을 올라 갈림길에서 우측으로 향하면 급경사가 나타난다. 이급경사 양 옆으로도 무덤이 존재한다. 그길을 따라 거대한 무덤이 눈에 드러날 때쯤에 먼저 눈에 띄는것은 큰 소나무와 그네였다. 소나무가 그곳에 있는 것도(어쩌면 그 소나무 주변의 나무들은 무덤군을 정비하면서 사라졌을 수도 있다.), 그곳에 그네를 매달아 둔 것도 이 무덤을 즐기는 좋은 풍경이었다. 소나무 아래에 서면 고령읍내가 훤히 보였다. 왕과 귀족들은 죽어서도 사람들을 내려다 보고 있었다.
44호분이라고 이름 붙여진 무덤은 다른 무덤에 비해 넓은 공간을 차지하고 있었다. 그 정도 대접을 받을만한 무덤이기는 하다. 다른 무덤들은 산에서 떨어지지 않기 위해 붙어있다는 느낌이라면 44호분은 넓은 마당을 두고 있다. 44호분은 우리 나라에서 처음으로 순장의 기록을 실물로 확인시켜 준 무덤으로 유명하다. 실물로 보는 크기는 경주에 있는 무덤과 비교해도 뒤쳐지 않았다.
44호분을 지나 조금더 오르면 5호분이 발굴 중이었다. 그 옆으로 능선을 따라가다 보면 1호분까지 나온다. 1호분을 지나 숲길을 지나면 대가야의 주산성으로 연결된다. 주산성으로 가는 길에는 대야가의 토기 파편들을 길에서 쉽게 발견할 수 있다.
일본은 임나일본부설의 흔적을 찾기 위해 가야의 무덤들을 파헤쳤다. 당연히 이렇게 큰 무덤들은 표적이 될 수 밖에 없었고, 도굴에 가깝게 파헤쳐진 무덤에서 발굴된 유물들은 일본으로 건너가 지금도 일본에 있다. 학자적 양심이라면 발굴보고서를 남겼어야 했지만 그러지 않았다. 힘없는 약소국의 문화재들은 지금도 타향살이를 하고 있는 것이다.
주산성까지 가는 사람들은 없었다. 호젓한 산길을 따라 걷다 보면 금방 주산성이 나타난다. 일부를 발굴하고 복원해 놓았다. 한번 찍었다는데 의미를 가지고 다시 1호분부터 44호분을 거쳐 왕릉전시관과 박물관을 둘러봤다. 꽤 연세있으신 분들도 열심히 산을 오르고 있었고, 아이를 데리고 온 엄마는 아이들에게 이 무덤군이 주는 의미에 대해 열심히 설명하고 있었다.
무덤군 곳곳에서 빨간 깃발을 쉽게 찾아 볼 수 있다. 무덤군을 정비하면서 개인 무덤들을 옮길려고 하는 것이었다. 주인을 잃은 무덤들은 본인의 의지와 상관없이 어디론가 떠나야 할 운명이었다. 결국은 왕과 귀족들에 쫒겨서 죽어서도 편히 쉬지 못하고 이사를 가야하는 것이다. 예나 지금이나 힘없는 사람들은 이리 저리 옮겨다니면서 살아야하는 운명인가 보다.
아쉬운 점은 박물관을 무덤군 아래에 두었는데 너무 크게 만들어 무덤군의 경관을 해치고 있었다. 차라리 무덤군과 왕릉전시관을 길건너 주차장쪽으로 두고 박물관과 그 앞 광장은 차라리 잔디를 깔아 두었으면 어땠을까 생각해 보았다. 유홍준 교수가 극찬한 백제 부여왕릉원을 능가하지 않았을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