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른의 일상적 난독증

by 경경 GyongGyong

어쩌면 우리는 일상적으로 삶을 오독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어른은 크고 넓음을 의미할 터이다. 그러나 아쉽게도 어른은 통하지 않음을 어렵지 않게 경험한다. 딱딱하게 굳어서, 좀 더 호의적으로 표현하면 매우 견고해서 비집고 들어갈 빈틈을 허용하지 않는다. 모든 주위의 현상은 오랜 세월 촘촘해지고 견고해진 어른만의 경험과 가치의 망에 필터링된다. 대부분은 그 망에 걸려 읽히지 않은 채 어른의 무의식의 심해로 버려진다.


나도 물리적으로는 어른이 되었다. 사회적으로 정신적으로 어른이 되었는지는 프라이버시다. 요사이 어렵지 않게 경험하는 것이 스스로의 견고함이다. 상업적 가치를 두지 않는 거의 대부분의 영역에서 스스로를 굽히는 경우는 없음을 자각한다. 심지어는 집안에서도. 그런데 요사이 아이들도 10년 여의 길지 않은 인생에도 매우 견고한 가치관과 세계관을 스스로 구성하고 보유하게 됨을 종종 경험한다. 견고하다고 알고 있던, 그러나 매우 협소한 어른의 관이 채 몇 년 되지 않았을 아이들의 관 앞에서 힘없이 흡수되는 이상한 경험을 한다.


물리적으로 어른인 나는 아이같이 성마르고 많이 예민하다. 밖에서 그나마 참았던 일들을 도량이 한없어 보이는 아내에게 모두 고한다. 아내는 일상적 촌극을 보며 나름대로 형성한 가치관이 있는 듯싶다. 물리적 어른의 조잘거림을 귀 기울여 들을 뿐이다. 한바탕 촌극을 벌이고 나서도 나의 성마름은 그치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어른답지 못한 이런 아빠의 모습을 간혹 발견하고는 아이가 말한다. “그럴 때도 있지요”라고. 그럴 수도 있지, 그럴 때도 있지. 다 아는 말인데, 목젖 밑으로 넘기지 못할 때가 많다. 그런데 이제 갓 줄기를 뻗친 풀 같은 아이가 물리적으로 다 자란 듯한 나무에게 툭 치며 조언한다. 바람이 세게 불 때도 있지. 올바른 건 얌전히 수용하는 게 어른이지 않은가. 그런데, “삶이 그렇게 심플하지 않아, 얘야”라며 부질없이 저항하는 물리적 어른인 아이 같은 이가 그곳에 떡하니 서있음을 매번 목격한다.


행간을 읽어야 한다고 한다. 그런데 이는 우리의 일상에도 적용된다. 보이는 것이, 들리는 것이, 느끼는 것이 전부가 아님을 알게 된다. 물리적으로 어른이 될수록 일상적으로 체험하게 된다. 상상해 본다. 혹 물리적 어른이 스스로를 사회적, 정신적 어른으로만 확신하고 견고해진다면 일상 속의 보잘것없이 보이는 행간을 과연 독해해 낼 수 있을지. 스스로를 보았을 때 그래서는 거의 행간을 읽어 낼 수 없음을 안다. 그런데 삶을 해석할 실마리가 이 행간에 담겨 있다고 한다면, 나와 같은 물리적 어른이 삶을 오독할 확률은 매우 높아질 것이 틀림없다. 소설이나 영화라면 마지막 반전 장면을 통해 그때까지 쌓아온 모든 이해를 집어던질 수나 있을 텐데, 삶의 마지막 즈음에서야 그 반전이 우리에게 해석된다면 소설을 읽거나 영화를 보는 것과 같이는 되지 않지 않을까 싶다. 이건 납량특집이다.


행간을 읽는 연습을 당장 지금부터라도 해야 할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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