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PTSD, 그리고 조울증으로 치료받는 나

기분 조절 시스템이 무너졌을 때, 기분안정제는 어떻게 회복을 돕는가

by 민진성 mola mola

우울만 올 줄 알았다

CPTSD라는 말을 처음 들었을 때, 나는 우울증을 떠올렸다. 우울하고, 무기력하고, 무가치하게 느끼는 것. 그게 전부일 줄 알았다. 그런데 내 몸은 예상과 달리 다른 길을 택했다. 우울을 지나고 나니 공황이 터지고, 강박이 쏟아지고, 밤새 잠을 이루지 못했다. 어떤 날은 머리가 너무 빨리 돌아가서 계획을 미친 듯 세우고, 말수가 늘고, 몸이 과열된 듯한 느낌이 들었다. 결국 병원에서는 이렇게 진단했다. “양극성 II형 장애 가능성이 높습니다. 기분안정제를 드셔야 해요.” 처음엔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외상 때문이라면 왜 조울증으로 가야 하지? 무너졌다면 그냥 우울해져야 하는 거 아니야?”



CPTSD는 기분 조절 전체를 흔든다

트라우마 연구에 따르면, CPTSD는 단순히 우울만 만드는 것이 아니라 기분 조절 시스템 전체에 영향을 미친다. 편도체는 과각성 상태로 공포 신호를 계속 울리고 전전두엽은 이를 억제하느라 과부하 상태에 놓인다. 보상 회로(측좌핵, 전측대상피질)는 도파민 분비 리듬이 깨져 어떤 때는 과도하게, 어떤 때는 거의 안 나오게 된다. 이로 인해 나타나는 것이 에너지 저하, 무기력, 삶의 의미 상실이 나타나는 우울기, 잠이 줄고, 말이 많아지고, 사고가 빨라지고, 계획과 행동이 폭발 경조증기이다. 즉, 외상 후 뇌는 한쪽 극단에서 다른 극단으로 출렁이며 균형을 찾으려는 시도를 한다.



기분안정제는 억제가 아니라 조율이다

기분안정제는 단순히 “흥분을 눌러서 둔하게 만드는 약”이 아니다. 뇌 속에서 과도하게 오르내리는 신경전달물질(도파민·세로토닌·GABA 등)을 적정 수준으로 맞추는 ‘조율기’ 역할을 한다. 덕분에 나는 밤에 잠이 조금씩 가능해지고 사고 속도가 줄어들고, 공황의 빈도가 낮아졌다. 이제야 나는 내가 감당할 수 있는 속도로 감정과 기억을 마주할 수 있게 되었다.



치료와 회복은 ‘둘 중 하나’가 아니다

많은 사람들이 “외상으로 생긴 증상은 약으로 치료하면 안 된다”거나 “약을 먹으면 내 본모습이 사라진다”라고 두려워한다. 하지만 나는 약을 먹으면서 오히려 내가 원래 어떤 사람이었는지를 조금씩 회복하고 있다. 기분안정제가 나를 억누르는 것이 아니라, 나답게 살 수 있는 기초 체력을 만들어 준 것이다.



조울증 진단은 끝이 아니라 과정

CPTSD 이후 내가 양극성 II형 장애 진단을 받고 기분안정제를 복용한다는 사실은 내가 무너졌다는 증거가 아니라, 내 신경계가 더 이상 억지로 버티는 대신 도움을 받아 균형을 회복하고 있다는 신호다. 이제 나는 생존 모드에서 벗어나 조금 더 느리고, 조금 더 안정된 속도로 나의 외상, 나의 관계, 나의 삶을 다시 조율하고 있다.




#생각번호20250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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