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전’이라 부르는 이유: 후성유전으로 본 폭력의 흔적

환경이 만든 변화가 다음 세대까지 이어질 때

by 민진성 mola mola

경험은 몸에 흔적을 남긴다

아동학대나 트라우마를 겪은 사람의 몸에서는 스트레스 반응 회로가 바뀐다. 하지만 이 변화는 DNA 염기서열, 즉 유전자 글자 자체가 변한 게 아니다. 변하는 것은 DNA 위의 스위치 — 유전자가 얼마나 읽히는지를 조절하는 후성유전 표지다. 메틸화(methylation)라고 불리는 이 스위치는 글자를 덮어 "읽지 말라"는 표시를 한다. 결과적으로 스트레스 조절 유전자가 덜 발현되고, HPA축(시상하부–뇌하수체–부신 축)이 과활성 상태로 남는다. 몸은 늘 위기 모드에 머물며, 작은 자극에도 과민하게 반응한다.



2. 세포 안에서 이어지는 ‘기억’

이 스위치는 일시적이지 않다. 세포가 분열할 때마다 새로운 세포로 복사되어, 같은 상태를 유지한다. 즉, 내 몸의 수많은 세포들이 똑같은 "위기 패턴"을 공유하게 되는 셈이다. 이렇게 장기적이고 안정적으로 유지되는 변화라는 점에서 과학자들은 ‘유전적’ 성격을 부여한다. 경험이 생물학적 기억으로 새겨지는 것이다.



세대 간으로도 일부 이어진다

더 나아가 이 변화는 때로 다음 세대까지 이어진다. 부모의 정자·난자에서 메틸화 패턴이 유지되거나 임신 중 높아진 스트레스 호르몬이 태아 발달에 영향을 주기도 한다. 그래서 아동학대 경험이 있는 부모의 아이가 태어날 때, 이미 더 민감한 스트레스 반응 세팅을 갖추고 태어나는 경우가 있다. 이런 현상을 과학자들은 세대 간 후성유전 전이(intergenerational epigenetic transmission)라고 부른다.



그러나 운명은 아니다

중요한 사실은, 이 변화가 가역적이라는 점이다. 안전한 환경, 심리치료, 사회적 지지, 경제적 안정이 이어질 때 스위치는 다시 조정될 수 있다. 메틸화 패턴은 경험 의존적이기 때문에, “이제 위험이 없다”는 신호가 누적되면 다시 읽히기 시작한다. 즉, 후성유전은 숙명이 아니라 가능성이다. 과거의 경험이 흔적을 남길 수는 있지만, 그 흔적이 다음 세대까지 반드시 이어지도록 강제하지는 않는다.



새로운 시작점 만들기

아동학대 경험이 있는 성인이 결혼하고 아이를 낳을 때, 그 아이가 “스위치가 꺼진 상태”로 태어날 가능성은 있지만, 부모의 회복, 치료, 안정적 양육이 그 리스크를 크게 줄인다. 후성유전은 결정론이 아니라 기회다. 환경이 달라지면 유전자 발현도 달라지고, 다음 세대는 전혀 다른 시작점을 가질 수 있다.



맺음말

우리는 흔히 "유전"이라는 단어를 들으면 숙명을 떠올린다. 하지만 후성유전은 숙명이 아니라 몸이 배운 기억이다. 기억은 다시 배울 수 있다. 환경을 바꾸고, 안전을 회복하면, 그 기억은 덮어지거나 새로 쓰일 수 있다. 폭력의 흔적을 남기지 않는 사회는, 결국 이런 새로운 기억을 만들 수 있는 사회다.




#생각번호202509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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