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과서에 나오지 않는 나의 CPTSD

다중폭력피해경험이 만든 복잡한 상처와 회복의 길

by 민진성 mola mola

내 증상은 왜 교과서에 없을까

처음 CPTSD(복합외상후스트레스장애) 진단을 받았을 때, 나는 책을 찾아보았다. 플래시백, 악몽, 회피, 과각성 — 교과서에는 늘 이런 증상들이 적혀 있었다. 그런데 나는 그와 조금 달랐다. 악몽도 있었지만, 어떤 날은 감각이 완전히 차단된 듯 멍했고, 어떤 날은 이유 없이 분노가 터졌다. 누군가 나를 사랑한다고 해도 믿기지 않았고, 한순간에 그 관계를 스스로 깨뜨리기도 했다. 나는 “왜 나는 전형적 PTSD처럼 보이지 않을까?” 스스로 이상한 사람이라고 느꼈다.



다중폭력피해경험이라는 개념을 알게 되다

그때 떠올린 개념이 학부 세미나에서 배웠던 ‘다중폭력피해경험(poly-victimization)’이었다. 이는 한 사람이 한 가지 폭력만이 아니라 여러 유형의 폭력을 반복적으로, 동시에 겪는 것을 말한다. 어릴 적부터 가정폭력, 정서적 방임, 학교 괴롭힘 등 서로 다른 맥락의 폭력이 겹쳐서 들어오는 경험. 그런 환경에서는 ‘하나의 사건’으로 기억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삶 전체가 위험으로 덮이는 느낌을 남긴다. 이런 경험을 한 사람은 단순 PTSD보다 훨씬 복잡한 증상을 보이는 경향이 있다.



뇌와 몸이 겪는 변화

신경과학 연구에 따르면 반복적 폭력 노출은 HPA축(시상하부-뇌하수체-부신 축)을 과도하게 자극해 스트레스 시스템이 망가진다. 어떤 사람은 항상 긴장하고, 잠이 오지 않는다. 어떤 사람은 감각이 무뎌지고, 아무 감정도 느끼지 못한다. 때로는 같은 사람 안에서 이 두 가지가 번갈아 나타난다. 즉, “과각성”과 “둔감”이 동시에 나타나는 복합적 양상. 교과서적 PTSD 모델로는 설명되지 않는 부분이다.



정체성과 관계까지 흔드는 상처

C-PTSD의 특징은 단순한 공포 반응을 넘어서 자기 정체성과 대인관계를 무너뜨린다. “나는 가치 없는 사람”이라는 자기 신념, 만성적 공허감, 무기력, 사랑받을 자격이 없다는 느낌, 가까운 관계에서 반복되는 불신과 자기파괴. 이것은 단순히 트라우마 장면을 떠올리며 불안해지는 것과는 다르다. 삶 전체의 감각, 사람과의 관계 맺는 방식이 바뀌어 버린다.



연구가 보여주는 사실

심리학자 Cloitre et al.(2013)은 다중폭력피해 경험자가 단일 사건 PTSD 집단보다 정서 조절 곤란, 대인관계 문제, 부정적 자기개념에서 훨씬 높은 점수를 보인다고 보고했다. Turner et al.(2010)은 poly-victimization 아동이 우울·불안뿐 아니라 자살사고, 공격성, 학교 부적응 위험도 훨씬 높다고 밝혔다. 즉, 내가 겪는 복잡한 증상들은 ‘비정상’이 아니라 내가 겪은 경험이 복잡하기 때문에 나타나는 정상 반응이다.



회복은 단계적으로, 오래

이 사실을 알고 나서야 나는 나를 조금 다르게 바라볼 수 있었다. 내 증상은 “틀린” 게 아니라 “깊은” 것이었다. 회복도 한 번의 치료로 끝날 수 없고 안전 확보 → 신체 안정화 → 관계 회복 → 서사 통합이라는 여러 단계를 차근차근 거쳐야 한다. 이제 나는 증상이 돌아올 때 “또 무너졌다”가 아니라 “아직 회복 과정의 한 부분”이라고 말할 수 있게 되었다.



복잡하지만, 여전히 가능하다

교과서에 나오지 않는 CPTSD 증상은 이상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다중폭력피해경험이 남긴 복잡한 흔적이다. 이 사실을 아는 것만으로도 자기비난 대신 자기이해가 시작된다. 그리고 이해는 회복의 첫걸음이다. 나는 여전히 회복 중이지만, 적어도 이제는 내가 겪는 일이 설명되지 않는 미스터리가 아니라 과학적으로 이해 가능한 과정임을 안다. 그것만으로도 조금 덜 외롭다.




#생각번호202509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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