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인의 불행을 유희로 소비하는 사회에서
실종 사건, 범죄 뉴스, 비극적 사고가 터질 때마다 사람들은 몰려든다. 댓글창은 분노와 공포로 가득 차고, SNS에는 사건의 전개 상황이 실시간으로 공유된다. 놀라운 건, 이 과정에서 많은 사람들이 스릴을 느낀다는 사실이다. 마치 넷플릭스 범죄 다큐를 보듯 사건을 추적하고, 목격자 제보를 찾아보고, 범인의 심리를 분석한다 사회학에서는 이런 현상을 위험의 유희화(Risk as Entertainment)라고 부른다. 우리는 실제로는 안전한 자리에서 타인의 불행을 소비하며, 거기서 분노와 공포, 안도와 카타르시스까지 느낀다. 그러나 당사자에게 이 경험은 결코 가볍지 않다. 누군가에겐 죽음에 대한 실질적 공포, 심리적 플래시백, 공황 발작으로 이어지는 트리거다.
같은 사건도 누군가에겐 생존의 문제, 누군가에겐 심심풀이가 된다. 병리나 트라우마가 없는 사람은 “내 일이 아니야”라는 심리적 거리를 확보한 상태에서 사건을 바라본다. 그래서 마음껏 분노하고, 즐기고, 심지어 ‘추리 놀이’처럼 접근할 여유가 있다. 반면 트라우마 경험자는 이 사건이 현재의 위협처럼 다가온다. 뇌가 생존 모드로 전환되면서 실제 스트레스 호르몬이 분비되고, 심장이 뛰고, 숨이 가빠지고, 때로는 해리와 공황이 찾아온다. 이 차이를 사회심리학에서는 관람자의 통제감으로 설명한다. 관람자는 “언제든 꺼버릴 수 있다”는 확신이 있으니 감정을 끝까지 밀어붙여도 안전하다. 하지만 당사자는 꺼버릴 수 없다. 사건은 곧장 자신의 경험과 연결되고, 이미 한 번 겪은 고통을 다시 재생산해야 하는 상황에 놓인다.
또 하나 흥미로운 점은, 이런 사건에 분노하거나 공유하는 행동이 일종의 도덕적 신호 보내기(Moral Signaling)로 기능한다는 점이다. “나는 아동 보호에 관심 있다”, “나는 정의롭다”는 메시지를 드러내면서 자신의 도덕적 정체성을 강화하고 사회적 지위를 확인한다. 이 과정 자체는 공동체 유지에 필요한 장치일 수 있지만, 문제는 타인의 고통이 자원처럼 소비된다는 사실이다. 당사자는 여전히 힘겹고, 회복 중이며, 때로는 살아남기 위해 몸부림치고 있는데 그 고통이 누군가의 ‘분노 연습’과 ‘정의감 확인’의 재료가 된다.
이런 풍경은 CPTSD를 겪는 나 같은 사람에게 깊은 소외감을 남긴다. 나에게는 지금도 끝나지 않은 사건인데, 누군가는 이걸 스릴러처럼 소비하고 “재밌다” “충격이다”를 말한다. 마치 내가 살아온 삶이 하나의 구경거리로 전락한 듯 느껴진다. 그러나 이 감각을 인식하는 것 자체가 나에게는 회복의 일부다. 나는 오늘도 내 감각을 글로 붙잡고, 고통이 다시 소비되지 않도록 내 서사로 되돌려오려 한다.
결국 우리가 던져야 할 질문은 이것이다. 타인의 고통을 소비할 때, 우리는 그 고통을 존중하고 있는가? 그 사건이 끝나고도 여전히 남아 있는 사람들의 시간을 상상해본 적 있는가? 고통을 안전거리에서 바라보는 것에서 그치지 말고, 고통 이후의 회복 과정까지 함께 바라보는 태도가 필요하다. 그것이 당사자가 다시 세상으로 돌아올 수 있는 최소한의 배려다.
#생각번호202509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