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PTSD 이후의 혼란, 그리고 사유의 성장
나는 극이 회색지대로 빠질 때 가장 몰입한다. 범죄자의 사연을 알게 되고, 피해자와 가해자의 경계가 흐려지고, 정의를 구현하는 인물마저 딜레마에 빠질 때 비로소 숨이 트인다. 명쾌한 결말은 안도감을 주지만, 오래 남지 않는다. 오히려 나는 혼란 속에서 사고가 확장되고, 내 윤리의 경계가 시험받을 때 살아 있음을 느낀다. 사회심리학에서는 이런 선호를 인지적 복잡성(cognitive complexity)이라고 부른다. 여러 층위의 가능성을 동시에 붙잡고 사고하려는 성향이다. 단순한 흑백 논리를 넘어서려는 이 복잡성은, 사람이 더 깊은 통찰과 창의성을 발휘할 수 있게 만드는 중요한 기질로 여겨진다.
나의 CPTSD 경험은 아마 이 성향을 강화했을 것이다. 어린 시절, 폭력과 보호가 한 자리에서 나타나는 순간들을 반복해서 겪으면서 나는 늘 스스로에게 물어야 했다. “이건 사랑일까, 폭력일까?” 이 모순된 경험은 나의 뇌를 끊임없이 예측하고 맥락을 분석하는 모드로 만들었다. 임상심리 연구에서도 트라우마 생존자는 세상을 더 입체적으로, 더 조심스럽게 읽으려는 경향이 있다고 말한다. 나는 아마 그 경향을 예술과 서사에서 실현하고 있는 셈이다. 어두운 범죄물, 타락한 주인공, 모순된 정의의 이야기들이 내게는 또 다른 “안전한 시뮬레이션”이다. 현실에서 경험했던 혼란을 다시 들여다보고, 조금씩 통합해 가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혹자는 말할지 모른다. “혼란을 즐기는 건 위험한 것 아니냐”고. 하지만 내가 좋아하는 건 혼란 자체가 아니라 혼란을 통해 사고가 깊어지는 경험이다. 소크라테스는 이런 상태를 아포리아(aporia)라고 불렀다. 기존의 확신이 무너지고, 일시적 난관 속에서 비로소 새로운 사유가 시작되는 순간이다. 나에게 회색지대는 바로 그 아포리아의 공간이다. 내 세계를 무너뜨리고, 다시 세우고, 윤리의 층위를 더 정교하게 쌓아 올릴 수 있는 장이다.
사회는 종종 타인의 고통을 엔터테인먼트로 소비한다. 실종 사건, 범죄 뉴스, 미스터리 다큐는 클릭률을 높이고, 공포와 분노를 자극하고, 사람들로 하여금 안전한 자리에서 스릴을 경험하게 만든다. 하지만 CPTSD를 가진 나 같은 사람에게 그 사건은 ‘구경거리’가 아니라 실제 생존의 문제다. 심장이 뛰고, 손끝이 차가워지고, 뇌는 그 순간을 다시 살아내듯 반응한다. 그럼에도 나는 여전히 회색지대 이야기를 본다. 왜냐하면 그 속에서 나는 내가 겪은 혼란을 다시 나만의 언어로 붙잡고, 내 서사로 되돌려오기 때문이다.
트라우마 이후 성장(Post-Traumatic Growth) 연구에 따르면 어떤 사람들은 사건 이후 더 깊이 있는 가치관과 삶의 목적을 발견한다. 나에게 회색지대는 그 성장의 무대다. 나는 거기서 윤리를 재설계하고, 정의와 자비, 책임과 용서의 경계를 다시 탐색한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비로소 조금씩 자유로워진다. 나는 혼란을 피하지 않는다. 오히려 혼란 속에서 다시 나를 찾는다. 그것이 내가 회색지대를 사랑하는 이유다.
#생각번호202509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