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는 누구의 것인가
어릴 적 나는 히어로물을 좋아했다. 스파이더맨, 배트맨, 아이언맨… 그들은 언제나 약자를 구하고, 악당을 물리치고, 세상을 구했다. 그들의 힘과 확신은 나를 안심시켰다. 세상은 결국 정의가 이기는 곳이라고, 언젠가는 나도 구원받을 거라고 믿게 만들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나는 묻게 되었다. 정의의 이름으로 폭력을 휘두르는 그들은 과연 범죄자와 무엇이 다를까?
배트맨은 밤마다 고담의 범죄자를 사적 정의로 처단하고, 아이언맨은 국제법보다 빠르게 전쟁터에 개입한다. 그들은 경찰이 할 수 없는 일을 대신하고, 법이 금지하는 폭력을 행사하며, 때로는 생명을 빼앗는다. 정치철학에서는 이런 현상을 비공식 정의(unofficial justice)라고 부른다. 국가의 폭력 독점이 실패했을 때, 개인이 스스로 정의를 집행하는 것. 하지만 그 정의는 민주적 합의가 아닌 한 사람의 판단에 달려 있다. 그들이 구하지 못한 사람은 어떻게 되는가? 그들의 판단이 틀렸다면 누가 책임지는가?
나는 종종 이런 생각까지 한다. 어쩌면 히어로도 강자가 되고 싶어서 강자를 처단하는 건 아닐까? 세상을 지배하는 부패한 권력에 분노하면서도, 그 권력을 대신 차지하고 싶은 마음. 넷플릭스 시리즈〈더 보이즈(The Boys)〉는 바로 이 모순을 정면으로 드러낸다. 그곳의 히어로들은 기업의 홍보 상품이자 권력의 수단이다. 그들이 악당을 처단하는 순간조차 PR 전략의 일부이고, 그들의 폭력은 때때로 민간인 피해를 낳는다. 심리학에서는 이를 보상적 통제(compensatory control)라 부른다. 무력감을 느끼는 개인이 통제감을 회복하기 위해 강한 존재에 동일시하거나 스스로 강자가 되려는 시도다. 히어로물이 주는 대리 만족은 결국 ‘약자가 강자로 거듭나는 판타지’일지도 모른다.
나에게 이 문제는 더 복잡하다. CPTSD를 겪는 나에게 강자는 늘 양가적인 존재였다. 어릴 적 나를 지켜주지 못한 어른도 강자였고, 나를 다치게 한 사람도 강자였다. 그래서 강자를 처단하는 히어로에게 카타르시스를 느끼면서도 동시에 냉소적인 시선으로 묻는다. “너도 결국 폭력을 쓰는 건 똑같잖아?” 영화 〈조커〉(2019)에서 아서 플렉이 범죄자로 변모하는 과정을 보며 나는 그가 두려우면서도 이해되었다. 그의 폭력은 정당화될 수 없지만, 그의 분노는 내 안에 있던 무력감의 메아리를 울렸다. 나는 히어로를 숭배하는 대신, 그들이 가진 권력의 위험성까지 같이 보려 한다.
최근 나는 극이 회색지대로 빠질수록 더 매료된다. 넷플릭스 〈데어데블〉은 히어로가 범죄자처럼 법을 어기고, DC의 〈왓치맨〉은 히어로들이 오히려 새로운 갈등의 씨앗이 된다. 범죄자에게 사연이 생기고, 정의의 주체가 딜레마에 빠지고, 누구도 완벽히 선하거나 악하지 않은 세계. 철학에서는 이런 상태를 아포리아(aporia)라 부른다. 기존의 확신이 무너지고, 일시적 혼란 속에서 새로운 사유가 시작되는 순간이다. 나는 그 혼란 속에서 비로소 숨이 트인다. 명쾌한 결말보다, 끝없는 질문을 남기는 이야기가 오히려 나를 살아 있게 만든다.
히어로와 범죄자의 경계가 흐려질 때, 우리는 정의가 누구의 것인지 다시 묻게 된다. 법의 것인가, 개인의 것인가, 아니면 힘 있는 자의 것인가. 나는 오늘도 히어로물을 본다. 하지만 더 이상 단순히 안심하지 않는다. 그들이 구한 사람보다 구하지 못한 사람을 생각하고, 그들이 쓴 폭력의 대가를 상상하고, 그들의 정의가 누구를 위한 정의였는지 묻는다. 그 질문 속에서 나는 조금씩 자유로워진다. 히어로의 힘을 빌리지 않고도 스스로 나의 윤리를 다시 세워 나갈 수 있기 때문이다.
#생각번호202509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