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차피 죽을 인생이라면, 그래도 나는 끝까지 사랑할 것이다
그때 그녀는 말했다. “끝이 정해져 있다면, 이 관계를 계속 이어가는 게 맞을까? 더 깊어지기 전에 그만두는 게 낫지 않을까?” 그 말은 차분했지만, 잔혹했다. 그녀의 집은 병원장 집안이었다. 가족 구성원 모두 명문대 출신, 경제적으로 완벽했다. 나는 그 세계의 끝자락에 서 있었다. 그녀는 현실을 냉정히 계산했고, 나는 그 현실을 감당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그녀가 던진 질문은 단지 사랑에 대한 게 아니었다. 그건 삶 전체에 대한 은유였다. “결말이 이미 정해져 있다면, 살아가는 건 어떤 의미를 갖는가?”
사람은 모두 죽는다. 그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아침에 눈을 뜨고, 누군가를 만나고, 때로는 사랑한다. 죽음이 예견되어 있음에도 우리는 여전히 ‘오늘’을 산다. 사랑도 마찬가지다. 이별이 예정되어 있다고 해서 사랑이 덜 진실해지는 건 아니다. 어차피 죽을 인생을 아무 의미 없이 살지는 않듯, 어차피 끝날 사랑을 아무 감정 없이 시작하지 않는다.
그녀는 말했다. “우리의 차이는 너무 커. 언젠가 헤어질 거라면, 지금 멈추는 게 낫지 않을까?” 그녀는 미래의 불가능을 두려워했다. 나는 현재의 가능성에 머물고 싶었다. 그녀는 결과를 중심으로 세계를 보았고, 나는 과정을 중심으로 세계를 느꼈다. 그녀의 사고는 결정론적이었고, 나의 감각은 존재론적이었다. 그녀는 ‘끝’을 바라보았고, 나는 ‘지금’을 바라보았다.
삶이 죽음으로 끝난다고 해서 그 삶이 무의미하지 않듯, 사랑이 이별로 끝난다고 해서 그 사랑이 가짜는 아니다. 오히려 유한성이 의미를 만든다. 끝이 있기 때문에, 그 시간은 더 소중해진다. 하이데거는 인간을 ‘죽음을 향한 존재’라 불렀다. 그 말은 곧, 죽음을 아는 존재만이 진짜로 살아 있을 수 있다는 뜻이다. 사랑도 그렇다. 끝을 아는 사랑만이 진짜로 사랑할 수 있다.
다시 그 시절로 돌아간다면 나는 말할 거다. “그래, 우리 끝은 이미 정해져 있을지도 몰라. 그래도 나는 그 끝까지 너를 사랑할 거야. 왜냐면 나는 지금 너를 사랑하니까.” 그건 감정의 고백이 아니라, 존재의 선언이다. 사랑은 결말이 아니라 과정의 진실로 증명된다. 결국 모든 사랑은 유한하지만, 그 유한함 속에서 우리가 얼마나 진심이었는가가 사랑의 깊이를 결정한다.
끝이 정해져 있다는 건 어쩌면 인간이 거스를 수 없는 필연이다. 그러나 그 필연 속에서도 우리는 선택할 수 있다. 어떻게 사랑할 것인가. 어떤 마음으로 살아갈 것인가. 그 선택이 바로 자유의 증거다. 죽음이 신이 쓴 문장이라면, 사랑은 그 문장 위에 인간이 새기는 손글씨다.
죽음이 예견되어 있다 해도 삶을 포기하지 않듯, 이별이 예정되어 있다 해도 사랑을 멈추지 않는다. 그건 비합리적인 일이 아니라, 인간이라는 존재가 세계에 저항하는 가장 아름다운 방식이다. 어차피 죽을 인생, 나는 오늘도 사랑한다. 어차피 끝날 사랑, 나는 끝까지 진심일 것이다.
#생각번호202511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