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라우마는 경험의 문제다

그런데 왜 우리는 특정 ‘행동’을 특히 강조할까

by 민진성 mola mola

트라우마는 외상에 의해 생긴다고 말한다. 하지만 조금만 깊이 생각해보면, 트라우마는 사건 그 자체보다 그 사건이 내부에서 어떻게 경험되었는가의 문제라는 사실이 드러난다. 같은 일을 겪어도 누군가는 크게 흔들리지 않고, 누군가는 오랫동안 무너진다. 그 차이를 만드는 것은 사건의 객관적 크기가 아니라 그 사람이 그 경험을 어떤 의미로 받아들였는가, 그리고 그것을 해석하고 통합할 자원이 있었는가다. 그런데 트라우마에 대한 많은 서술을 읽다 보면 유독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방식이 있다. 특정 행동을 중심으로 한 분류, 그리고 그중에서도 “특히 성적 학대의 경우”라는 표현이다. 왜일까. 트라우마가 경험의 붕괴라면, 왜 우리는 여전히 행동에 키워드를 맞추는 서술을 반복하는 걸까.



트라우마의 본질은 ‘사건’이 아니라 ‘붕괴’다

현대 트라우마 이론에서 이미 널리 받아들여진 전제가 있다. 트라우마는 통제할 수 없는 상황에서, 의미화할 수 없는 경험이 신경계와 자기 개념을 압도할 때 발생한다. 즉, 핵심은 무슨 일이 있었느냐가 아니라 그 일이 내부에서 처리되지 못한 채 남았는가다. 그래서 어떤 사람에게는 사소해 보이는 말 한마디가 폭력보다 깊은 상처가 되기도 하고, 객관적으로 큰 사건이 상대적으로 덜 흔들림으로 지나가기도 한다. 이 지점만 놓고 보면,

행동 중심의 트라우마 서술은 본질에서 한참 벗어나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도 행동 중심 서술이 사라지지 않는 이유

이 불일치는 이론의 무지 때문이라기보다는 구조적인 필요에서 비롯된다. 첫 번째 이유는 연구와 통계의 문제다. 학문은 측정 가능한 변수를 필요로 한다. ‘그 사람이 어떻게 느꼈는가’는 수치화하기 어렵지만, ‘성적 학대 경험이 있는가’는 분류할 수 있다. 그래서 문헌은 필연적으로 행동 중심의 언어를 사용하게 된다. 두 번째 이유는 성적 학대가 특정 요소들을 동시에 침해할 확률이 높다는 점이다. 신체 경계, 자율성, 수치심, 관계 신뢰, 정체성. 성적 학대는 단일 사건일지라도 여러 층위의 붕괴를 한꺼번에 일으키는 경우가 많다. 이 때문에 임상 서술에서는 “특히 성적 학대의 경우”라는 표현이 등장한다. 이는 도덕적 서열을 매기려는 의도가 아니라, 동시 붕괴 가능성에 대한 경험적 관찰에 가깝다. 세 번째 이유는 역사적 맥락이다. 성적 학대는 오랫동안 부정되고 은폐되었고, 피해자에게 책임이 전가되어 왔다. 학문과 임상은 이에 대한 반작용으로 의도적으로 이 경험을 강조하고 명명해왔다. 문제는, 이 모든 이유가 합쳐지면서 의도치 않은 부작용이 생겼다는 점이다.



행동을 강조할수록, 경험은 사라진다

행동 중심 서술이 반복될수록 다음과 같은 경험들은 쉽게 밀려난다.

지속적인 정서적 방임

예측 불가능한 애착 환경

만성적인 무시와 위협

관계 안에서의 반복적인 철수

이 경험들은 눈에 띄는 사건이 없다는 이유로 “덜 심각한 것”처럼 취급되기 쉽다. 하지만 실제로는 이런 환경이야말로 CPTSD를 만들어내는 핵심 토양인 경우가 많다. 사건이 없어서가 아니라, 사건처럼 보이지 않아서 언어에서 지워질 뿐이다.



그래서 이 질문은 중요하다

“트라우마는 경험의 문제인데, 왜 서술은 자꾸 행동에 집착하는가.” 이 질문은 트라우마 이론의 허점을 지적하는 질문이 아니라, 언어와 분류 체계가 경험을 따라가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드러낸다. 이론은 이미 사건 중심에서 경험 중심으로 이동했지만, 우리가 사용하는 말은 아직 그 속도를 따라가지 못하고 있다.



트라우마를 다시 정의한다면

트라우마는 특정 행동의 목록이 아니라, 의미화되지 못한 경험의 잔여물에 가깝다. 그래서 어떤 행동은 누군가에게는 아무 일도 아니고, 누군가에게는 세계를 무너뜨리는 일이 된다. 이 차이를 지우는 순간, 트라우마는 설명이 아니라 낙인이 된다.


특정 행동을 강조하는 서술이 완전히 틀렸다고 말할 수는 없다. 하지만 그것이 유일한 언어가 되는 순간, 가장 중요한 질문이 사라진다. 그 사람에게, 그 경험은 무엇이었는가. 트라우마를 이해한다는 것은 사건을 분류하는 일이 아니라, 그 질문을 끝까지 놓지 않는 일일지도 모른다.




#생각번호20251219

이전 08화나는 왜 경계성 성격장애 기준에 해당해 보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