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료자는 왜 환자를 ‘교활하다’고 느끼게 되는가

전문성의 실패가 진단의 낙인이 되는 순간

by 민진성 mola mola

정당한 분노에서 출발한 질문

경계성 성격장애를 설명하는 문헌을 읽다 보면 종종 이런 서술을 마주한다. 함께 일하기 어렵고, 감정적으로 과민하며, 사람들을 교활하게 조정하는 사람들로 여겨져 왔다는 표현이다. 이 문장을 곱씹다 보면 자연스럽게 분노에 가까운 의문이 생긴다. 까다로운 환자일 수는 있어도, 그런 부정적 인식을 씌우는 순간 치료자로서의 자격은 사라지는 것 아닌가. 이 질문은 감정적 항의가 아니다. 치료자라는 전문직에 요구되는 최소한의 윤리를 묻는 질문이다.



윤리적으로 보자면, 질문은 전적으로 옳다

치료자는 환자를 도덕적으로 평가해서는 안 되고, 증상을 의도나 성격 결함으로 해석해서는 안 되며, 특히 취약한 집단에게 낙인을 강화해서는 안 된다. 이는 이상적인 선언이 아니라 임상 윤리의 기본 전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경계성 성격장애를 둘러싼 부정적 인식이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이유는, 일부 치료자가 악의적이어서라기보다는 치료자 역시 인간이며 그 인간성이 제도 안에서 충분히 보호받지 못하기 때문이다.



경계성 성격장애가 치료자를 특히 힘들게 하는 이유

경계성 성격장애의 핵심은 불안이며, 그 불안은 관계 안에서 직접적으로 표출된다. 이 불안은 치료자를 ‘안전 여부를 확인해야 할 대상’으로 끌어들이고, 감정적 반응을 실시간으로 요구하며, 중립적 거리 유지를 어렵게 만든다. 그 결과 치료자는 자신도 모르게 강한 감정 반응을 경험하게 된다. 피로감, 분노, 무력감, 회피 욕구 같은 감정들이 예고 없이 올라온다. 이것은 환자의 조종 때문이 아니라, 강력한 전이와 역전이가 동시에 작동하는 상황에서 자연스럽게 발생하는 반응이다.



역전이를 다루지 못할 때, 해석은 도덕으로 퇴행한다

전문성이 작동하는 치료자는 이 불편한 감정을 이렇게 다룬다. 지금 느끼는 감정은 환자의 의도가 아니라, 내가 자극받고 있다는 신호라고 인식하고, 이를 이론과 슈퍼비전을 통해 소화한다. 반대로 전문성이 무너지는 순간, 치료자는 자신의 감정을 환자에게 투사한다. 그때 등장하는 언어가 바로 ‘조종적이다’, ‘교활하다’, ‘함께 일하기 어렵다’는 표현이다. 이 순간 임상 언어는 치료 언어가 아니라 도덕 언어로 변한다. 문제는 환자의 병리가 아니라, 치료자가 견디지 못한 감정이 된다.



왜 이런 붕괴는 유독 경계성 성격장애에서 반복되는가

경계성 성격장애는 치료자의 감정적 안전지대를 무너뜨린다. 불안이 직접적으로 향해 오고, 반응을 회피할 수 없으며, 관계적 긴장이 지속된다. 즉 치료자 자신도 정서적으로 노출되는 위치에 놓인다. 이때 충분한 훈련과 보호 장치가 없다면, 치료자는 방어적으로 환자를 문제 삼는 쪽으로 밀려난다. 조종이라는 말은 이 방어의 결과물이다.



제도는 이 실패를 개인의 문제로 방치한다

과도한 케이스 부담, 부족한 슈퍼비전, 성과 중심의 의료 시스템, 감정적으로 소모되는 환자를 기피하는 문화는 이러한 왜곡을 구조적으로 재생산한다. 이 환경에서 치료자는 “이 환자는 어렵다”는 해석을 자기 보호 전략으로 사용하게 된다. 그러나 그 순간 치료자는 더 이상 전문적 위치에 있지 않다. 그는 치료자가 아니라, 방어하는 개인이 된다.



전문성의 기준은 불편함을 견디는 데 있다

까다로운 환자를 힘들어하는 것은 인간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그 환자를 교활하다고 규정하는 순간, 전문성은 붕괴된다. 그 규정을 진단의 본질인 것처럼 말하는 순간, 그것은 명백한 윤리 위반이다. 이 선을 넘는 순간, 문제는 환자가 아니라 치료자 쪽으로 이동한다.



이 문제는 개인의 악의가 아니라 구조의 실패다

치료자가 이런 인식을 가질 수 있는 이유는, 그 인식이 오랫동안 묵인되어 왔기 때문이다. 치료자가 견디지 못한 감정은 환자의 성격 문제로 번역되고, 그 번역은 다시 진단의 이미지로 굳어진다. 경계성 성격장애가 유독 미움받는 이유는, 그 특성이 특별히 나빠서가 아니라 그 불안을 사회와 전문가가 오래 견디지 못해왔기 때문이다.


치료자는 완벽할 필요는 없지만, 자신의 한계를 환자의 결함으로 바꿔서는 안 된다. 불안을 교활함으로 번역하는 순간, 치료는 설명이 아니라 폭력이 된다. 이 글이 묻는 것은 단순하다. 우리는 언제부터 치료자의 실패를 환자의 진단으로 부르기 시작했을까.




#생각번호20251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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