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달 단계를 건너뛴 걸까

감정을 느끼기 전에 감정을 이해하게 된 사람의 이야기

by 민진성 mola mola

발달 이론에는 이런 원리가 있다.

발달에는 일정한 순서가 있으며, 그 순서는 환경과 무관하게 보편적으로 나타난다. 단계를 건너뛰지 않고, 순서가 바뀌지도 않는다. 이 원리를 떠올리다 보면, 한 가지 의문이 생긴다. 나의 경우는 이 설명에 잘 들어맞지 않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나는 내가 느끼는 감정을 바탕으로 상대를 이해해 온 사람이 아니다. “내가 이런 감정을 느끼니까, 상대도 그렇겠지”라는 방식이 아니라 “보편적으로 인간은 이런 상황에서 이런 감정을 느낀다”는 일종의 일반 공식으로 타인의 감정을 해석해 왔다. 그렇다면 나는 감정 처리 발달을 건너뛰고 타인의 감정을 읽는 능력을 먼저 발달시킨 걸까. 그리고 지금에 와서야, 뒤늦게 감정 처리를 학습하고 있는 걸까.



발달의 ‘순서’는 하나의 사다리가 아니다

발달에 순서가 있다는 말은 종종 오해된다. 모든 능력이 하나의 단일한 단계표를 공유한다고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발달 이론에서 말하는 순서란, 같은 발달 영역 내부에서의 순서를 의미한다. 언어, 인지, 감정, 사회성은 각각 다른 궤적과 속도를 가진다. 한 영역의 발달이 다른 영역의 발달을 기다려 주지는 않는다. 그래서 발달은 하나의 사다리가 아니라, 여러 개의 선이 동시에 뻗어 나가는 구조에 가깝다.



내가 가진 능력은 ‘공감’이 아니라 ‘해석’에 가깝다

내가 사용해 온 방식은 흔히 말하는 정서 공감이 아니다. 자기 감정에 접속해 상대의 감정을 느끼는 방식이 아니라, 상황과 인간에 대한 일반적 모델을 통해 상대의 감정을 추론하는 방식이다. 이건 감정 공감이 아니라 인지적 공감, 혹은 이론적 마음 읽기에 가깝다. 이 능력은 자기 감정에 대한 접근이 약해도 작동할 수 있고, 정서적 공명이 없어도 꽤 정확할 수 있다. 즉, 감정을 ‘느끼지 못해서’ 생긴 능력이 아니라 다른 회로가 먼저 발달한 결과다.



발달 단계를 건너뛴 게 아니라, 비동기적으로 조직된 것이다

발달 이론에는 이런 개념이 있다. 비동기적 발달(asynchronous development). 어떤 영역은 빠르게 발달하고, 어떤 영역은 상대적으로 늦게 조직되는 상태를 말한다. 실제 인간 발달에서는 이 비동기성이 매우 흔하다.

인지 능력은 뛰어나지만 감정 조절은 미숙한 사람

타인의 행동은 잘 예측하지만 자신의 감정은 잘 모르는 사람

공감은 이론적으로 정교하지만 친밀감은 어려운 사람

이건 발달의 실패가 아니라 환경에 대한 적응적 발달이다.



왜 이런 발달이 만들어졌을까

이런 구조는 보통 자기 감정을 드러내는 것이 안전하지 않았던 환경, 자기 감정보다 타인의 상태를 빠르게 파악해야 했던 상황에서 만들어진다. 그럴 때 인간은 감정을 느끼기보다, 감정을 모델링하는 쪽으로 발달한다. 이건 결핍이라기보다 그 시점에서 가능한 최선의 전략이다.



지금의 감정 학습은 ‘되돌아감’이 아니다

그래서 지금 내가 감정 처리를 배우고 있다는 사실은 발달을 다시 밟는다는 뜻이 아니다. 이미 형성된 인지적 구조 위에 정서 인식과 처리 능력을 추가로 통합하는 과정이다. 발달은 과거로 돌아가는 일이 아니라, 구조를 재조직하고 연결하는 일이다. 성인기의 감정 발달은 어린 시절처럼 자동적으로 일어나지는 않지만, 학습과 성찰을 통해 충분히 가능하다.


나는 감정 발달 단계를 건너뛴 것이 아니라, 인지적 공감이 먼저 발달한 비동기적 발달 궤적을 가진 사람이다. 지금의 감정 처리는 늦어진 발달이 아니라, 이미 구축된 구조 위에 이루어지는 통합의 과정이다. 발달은 언제나 불균등하고, 그래서 더 인간적이다. 중요한 건 순서를 어겼는지가 아니라, 지금 어떤 방향으로 통합하고 있는가다.




#생각번호20251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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