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놈이라는 결정론적 환상

잠재력과 실현 사이의 거대한 간극을 메우려는 지적 투쟁

by 민진성 mola mola

설계도는 운명이 아니다

생명체의 모든 잠재력이 게놈에 기록되어 있다는 말은 매혹적이다. 하지만 나는 안다. 게놈으로부터 한 존재의 생애 전반을 추론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는 것을. 씨앗의 유전자가 아무리 훌륭해도 그것이 심긴 토양과 날씨, 그리고 우연이라는 변수가 개입하지 않으면 꽃은 피지 않는다.

그런데도 현대 과학은 왜 이토록 게놈에 집착할까? 어쩌면 우리는 게놈이라는 ‘닫힌 계’ 안에서 삶의 모든 불확실성을 통제하고 싶어 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모델링의 유혹: 변수를 줄이려는 본능

과학자들에게 게놈은 세상을 이해하기 위한 가장 강력한 추상화의 도구다. 생명이라는 복잡계는 너무나 많은 변수(환경, 섭생, 경험, 우연)로 가득 차 있다. 이 모든 것을 고려한 모델링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이때 게놈은 아주 매력적인 '고정 상수'가 되어준다. 환경은 변하지만 유전자는 변하지 않는다는 믿음. 그 고정된 데이터를 바탕으로 생명을 환원하고 모델링하고 싶어 하는 인간의 지적 욕망이 게놈 집착을 만들어낸다. 복잡한 현실을 다룰 수 없으니, 가장 근본적인 '코드'라도 완벽히 해독해 보겠다는 일종의 고집인 셈이다.



집합의 경계를 확정 짓고 싶은 욕망

의학계는 "암에 걸릴 확률이 높은 사람들의 모임"을 정의하고 싶어 한다.

게놈 연구는 불확실한 미래를 '집합의 영역'으로 끌어오려는 시도다. 특정 유전 변이를 가진 사람들을 하나의 집합으로 묶고, 그들에게 발생할 수 있는 잠재적 사건들을 일반화하여 관리하려는 것이다. 물론 그 추론이 빗나가는 경우가 허다하지만,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보다는 '설계도라도 쥐고 있는 상태'가 인간에게 더 큰 심리적 안정을 주기 때문이다.



집착 너머의 진실: 후성유전학과 창발성

나는 현대 과학계가 게놈에 '필요 이상으로' 집착하고 있다는 지적에 동의한다. 게놈은 악보일 뿐, 연주 그 자체는 아니다. 최근 주목받는 후성유전학(Epigenetics)은 유전자가 환경에 따라 어떻게 켜지고 꺼지는지를 보여주며, 게놈 결정론의 한계를 말해주고 있다.

결국 생명은 게놈이라는 하드웨어와 환경이라는 소프트웨어가 만나 일으키는 창발적(Emergent) 현상이다. 설계도(게놈)에만 집착하는 것은, 책의 목차만 보고 소설 전체의 감동을 예측하려는 것과 같다.



집착을 넘어선 이해로

내가 게놈에 관심을 두는 이유는 그것이 정답이기 때문이 아니라, 그것이 우리가 가진 가장 정교한 '입력 데이터'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잊지 않으려 한다. 모델링은 현실을 단순화한 것일 뿐, 현실 그 자체가 아니라는 사실을.

게놈에 대한 집착은 어쩌면 삶의 미스터리를 한 권의 코드로 요약하고 싶은 인간의 오만과 두려움의 산물일지도 모른다. 설계도를 읽는 법을 배우되, 그 설계도 밖에서 요동치는 생명의 진짜 잠재력을 놓치지 않는 것. 그것이 내가 모델링의 시대를 살아가는 균형 감각이다.




#생각번호20260113


본 글은 RE:Mind 아카이브 프로젝트의 일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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