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요의 공포

인간은 왜 자유보다 예속을 선택하는가

by 민진성 mola mola

에리히 프롬은 일찍이 '자유로부터의 도피'를 말했다. 인간은 구속에서 벗어나길 갈망하는 동시에, 막상 완벽한 자유와 풍요가 주어지면 그 안에서 길을 잃고 거대한 허무와 마주한다. 피렌체 인민들이 메디치의 화려함을 버리고 사보나롤라의 불꽃 속으로 뛰어든 것은, 역설적으로 그 풍요가 주는 '무거운 자유'를 견디지 못했기 때문이다.



풍요가 가져오는 '의미의 부재'

풍요는 생존의 문제를 해결해주지만, '존재의 이유'를 자동으로 제공하지는 않는다. 로디 조약 이후의 피렌체는 배고픔은 사라졌으나 "나는 왜 사는가?"라는 근원적 질문이 빗발치는 곳이 되었다.

예술과 인문주의는 아름답지만 모호하다. 반면 사보나롤라의 설교는 명확하다. "너는 죄인이고, 이 불꽃에 허영을 태워야 구원받는다." 인간은 모호한 풍요보다 명확한 억압 속에서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할지(회개와 절제) 알게 될 때 묘한 안도감을 느낀다. 억압은 삶에 강제적인 '의미'와 '목적'을 부여하기 때문이다.



'도덕적 우월감'이라는 마약

풍요를 그냥 즐기는 것에는 '차별화'가 어렵다. 하지만 절제와 억압은 강력한 구별짓기(Distinction)의 수단이 된다. "나는 저들처럼 먹고 마시는 허영에 빠지지 않고, 고결한 고통을 선택했다"는 믿음은 풍요가 줄 수 없는 고도의 도덕적 쾌감을 선사한다.

사보나롤라는 대중에게 메디치 가문이라는 '공공의 적'을 설정해주고, 그들을 단죄함으로써 인민들 스스로가 '신성한 심판자'가 된 것 같은 착각을 심어주었다. 인간에게는 자신의 욕망을 누르는 고통보다, 그 고통을 통해 남보다 우월해지고 싶다는 욕망이 더 클 때가 있다.



무질서에 대한 공포와 질서에 대한 갈구

풍요로운 사회는 필연적으로 다양해지고 복잡해진다. 이 복잡성은 누군가에게는 '혼란'으로 읽힌다. 사보나롤라 같은 선동가는 이 혼란을 '타락'으로 규정하고, 아주 단순하고 강력한 '질서'를 제시한다.

인간은 불확실한 미래를 향해 자유롭게 유영하기보다, 누군가 그어놓은 좁지만 확실한 선(Line) 위를 걷는 것을 본능적으로 편안해한다. 억압은 그 선을 선명하게 만들어주는 도구다. 그래서 인간은 풍요가 정점에 달해 시스템이 복잡해질 때, 스스로를 억압할 강력한 지도자나 이데올로기를 소환하곤 한다.



억압이라는 이름의 심리적 안전벨트

결국 인간이 풍요 속에서 억압을 가져오는 이유는, 자신의 주체성을 감당할 준비가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풍요를 온전히 즐기기 위해서는 고도의 '자기객관화'와 '도덕적 자율성'이 필요한데, 이는 엄청난 정신적 에너지를 소모하는 일이다.

대중은 차라리 자신의 의지를 강력한 타자(종교, 독재자, 엄격한 규율)에게 양도하고, 그 대가로 '생각하지 않아도 되는 평온'을 산다. 사보나롤라의 시대나 지금이나, 인간은 여전히 풍요라는 망망대해에서 스스로 닻을 내리기보다 누군가 자신을 좁은 항구에 가두어주길 갈망하는 모순적인 존재다.





#생각번호20260114




본 글은 RE:Mind 아카이브 프로젝트의 일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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