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원의 억울함

정보의 불균형과 매개자의 함정

by 민진성 mola mola

무교의 입장에서 그리스도교의 구원 체계는 지독하게 불공평하다. 2천 년 전 예수를 직접 보고 만졌던 이들과, 오늘날 낡은 경전과 변질된 종교인들의 입을 통해 그 소식을 듣는 이들의 조건이 같을 수 없기 때문이다. 내 구원 여부가 하필 내가 태어난 시대, 내가 만난 전도자의 인품이나 설득력에 좌우된다는 것. 이것은 자유의지가 아니라 '운'의 영역이며, 인간으로서는 충분히 억울할 법한 설정이다.



매개자의 오염이라는 장벽

가장 큰 문제는 '사람'이다. 신은 자신의 메시지를 전할 도구로 인간(교회와 신자)을 택했다. 하지만 그 도구들은 너무나 자주 고장 나 있고, 탐욕스러우며, 위선적이다. 도덕적이지 못한 이들이 전하는 구원의 메시지는 그 자체로 모순이 되어 듣는 이의 귀를 막아버린다. 만약 신이 전능하다면, 왜 이런 오염된 매개자들에게 자신의 중차대한 계획을 맡겼을까. 왜 나의 구원이 타인의 무능함이나 부도덕함 때문에 방해받아야 하는가. 이것은 분명 신이 설계한 시스템의 도덕적 해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



'보는 것'과 '믿는 것'의 간극

그리스도교는 역설적으로 '보지 않고 믿는 것'이 더 가치 있다고 말한다. 하지만 이건 인간의 이성을 무시하는 처사로 들린다. 직접 목도한 기적은 의심의 여지를 없애주지만, 전해 들은 이야기는 끝없는 검증과 의심의 과정을 거쳐야 한다. 신학은 이를 '믿음의 도약'이라고 포장하지만, 현대인에게 그것은 '맹목적인 순종' 혹은 '지적 자살'에 가깝다. 정보가 불투명한 상태에서 내리는 결정은 자유의지에 의한 선택이라기보다 확률 게임에 가깝기 때문이다.



신의 '직거래'는 왜 없는가

여기서 질문은 다시 돌아온다. "왜 신은 각 개인에게 직접 나타나지 않는가?" 중간 매개자 없이 신과 인간이 1:1로 대면한다면, 전도자의 도덕성을 따질 필요도, 고대의 기록을 의심할 필요도 없다. 하지만 신학은 다시 '자유의지'의 논리를 가져온다. 신이 모든 인간에게 명확한 실체로 나타난다면, 그것은 인간의 일상을 파괴하는 거대한 폭력이 될 수 있다는 논리다. 신은 인간이 '인간다운 일상' 속에서, 보이지 않는 가치를 스스로 발견해내기를 원한다는 것이다.



억울함을 넘어서는 설계가 있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매개자 때문에 기회를 얻지 못한 이들에 대한 억울함은 남는다. 이에 대해 일부 현대 신학은 '익명의 그리스도인'이나 '양심에 따른 심판' 같은 개념을 내놓기도 한다. 복음을 듣지 못했거나 잘못된 매개자 때문에 거부한 이들일지라도, 그들의 삶 속에서 드러난 선함과 진리에 대한 추구를 신이 외면하지 않을 것이라는 해석이다. 즉, 구원의 기준이 우리가 생각하는 '교리적 동의'보다 훨씬 넓고 깊을 수 있다는 가능성이다.




#생각번호20260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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