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정한 설계자

신은 눈물을 닦아주는가, 원리를 운영하는가

by 민진성 mola mola

무교의 시선에서 본 신은 결코 따뜻하지 않다. 그는 약자의 억울함을 풀어주기 위해 직접 개입하거나 시간을 되돌리지 않는다. 대신 '구원'이라는 거대한 매커니즘을 만들어두고, 인간들이 그 안에서 알아서 길을 찾기를 바란다. 다수가 고통받는 딜레마 속에서도 신은 침묵하며, 그저 자신이 정한 영적 원리가 굴러가게 둘 뿐이다. 이쯤 되면 질문하지 않을 수 없다. 신은 정말 약자를 위하는가, 아니면 그저 자신의 '시스템'을 위하는가.



개별적 슬픔보다 거시적 질서

그리스도교의 신은 '공의(Justice)'를 말한다. 하지만 그 공의는 종종 개인이 느끼는 '한(恨)'과 충돌한다. 억울하게 죽임당한 자의 입장에서 보자면, 가해자가 회개하고 구원받는 시스템은 공의가 아니라 폭력이다. 하지만 신은 개별적인 복수심을 채워주는 대신, '용서와 화해'라는 거대한 원리를 통해 인류라는 종 전체가 파멸하지 않도록 이끈다. 이 거시적인 관점에서 개개인의 억울함은 시스템의 유지를 위해 희생되어야 할 소소한 잡음처럼 취급받기도 한다. 신에게 인간은 '사랑하는 자녀'이기 이전에, 질서를 유지해야 할 '피조물'인 셈이다.



약자를 향한 편향인가, 생존을 위한 전략인가

성경은 신이 약자의 편이라고 입버릇처럼 말한다. 하지만 현실에서 약자는 여전히 짓밟히고 신은 기적을 행하지 않는다. 여기서 신학이 내놓는 답변은 기이하다. 신은 약자의 상황을 '해결'해주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고통에 동참'한다는 것이다. 예수가 십자가에서 가장 비참한 약자로 죽었다는 사실이 그 증거라고 말한다. 하지만 냉정하게 말해, 함께 아파하는 것이 무슨 실질적인 도움이 될까? 억울한 자에게 필요한 것은 공감하는 신이 아니라, 가해자를 즉시 처단하는 강력한 신이다. 결국 신의 '동참'은 무력한 자들을 달래기 위한 고도의 심리적 장치일지도 모른다는 의심이 든다.



진리라는 이름의 냉혹함

신이 운영하는 세계의 진리는 차갑다. 자유의지를 줬으니 그 결과도 너희가 책임지라는 것, 단 한 번의 기회를 줬으니 그것을 붙잡는 것은 너희의 몫이라는 것. 이 원칙주의는 때로 소름 끼칠 정도로 냉정하다. 정보가 닿지 않은 곳에서 태어난 이들, 잘못된 매개자를 만난 이들의 억울함은 '원리'라는 거대한 바퀴 아래 깔려 뭉개진다. 신이 진정으로 도덕적이라면 원리를 잠시 멈추고서라도 그들을 구해야 하지만, 신은 시스템의 일관성을 위해 침묵을 선택한다. 설계자에게는 개별적인 정의보다 전체 시스템의 완결성이 더 중요해 보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원한 신은 없다

결국 우리가 기대했던 '착한 자를 복 주고 악한 자를 벌하는' 권선징악의 신은 그리스도교 안에 존재하지 않는다. 거기엔 오직 자신을 던져 시스템의 결함을 메우려 했던 한 존재와, 그가 남긴 이해하기 힘든 사랑의 원리만이 남아 있다. 신은 약자를 위해 기적을 행하는 '해결사'가 아니라, 인간들이 서로를 억울하게 만들지 않는 세상을 스스로 만들어가도록 비정한 자유를 던져준 '방관자'에 더 가깝다.




#생각번호20260116




본 글은 RE:Mind 아카이브 프로젝트의 일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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