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복 불가능한 악은 어떻게 되는가
현대 사회의 비극은 종종 '회복 불가능'하다는 특징을 갖는다. 과거의 죄가 누군가의 뺨을 때린 것이라면 사과하고 약을 발라주면 되지만, 현대의 죄는 누군가의 삶의 터전을 영원히 앗아가거나 다음 세대의 미래를 통째로 가로채는 방식이다. '돌이킴'이 회개의 증거라면, 돌이킬 수 없는 죄를 지은 자는 결코 용서받을 수 없는 것일까. 신의 자비는 이 거대한 '불가능' 앞에서도 유효한가.
만약 구원이 '내가 저지른 일을 물리적으로 복구하는 것'에 달려 있다면, 현대의 책임자들 대부분은 지옥행 열차를 예약한 것이나 다름없다. 죽은 자를 살려낼 수 없고, 오염된 지구를 단번에 정화할 수 없으니까. 여기서 그리스도교는 인간의 '영적 파산'을 선언한다. 인간은 스스로의 죄를 결코 되돌릴 수 없는 무능한 존재라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하라는 거다. 구원이 '복구의 대가'로 주어지는 보상이라면 아무도 구원받을 수 없기에, 오히려 그 '불가능함'을 붙들고 신의 자비에 매달리라는 역설적인 논리다.
무교의 입장에서 이것은 가장 받아들이기 힘든 대목이다. "다 망쳐놓고 신에게 매달리면 끝인가?"라는 분노가 치미는 게 당연하다. 하지만 신학적 관점에서 구원은 가해자를 편하게 해주는 장치가 아니라, 오히려 가해자를 영원한 부채감 속에 가두는 장치이기도 하다. 용서받을 수 없는 일을 저질렀음에도 불구하고 '용서받았다'는 사실을 믿는 자는, 남은 생애 동안 자신이 결코 갚을 수 없는 빚을 진 채 그 부채를 조금이라도 갚기 위해 타인을 섬기는 삶으로 내던져져야 하기 때문이다. 즉, 구원은 '해방'이 아니라 '무거운 소명'으로의 전환이다.
이 서사에서 가장 억울한 건 역시 피해자다. 가해자가 신과 대화하며 구원을 논하는 동안 피해자의 고통은 여전하니까. 그래서 현대 신학의 일부는 '하나님의 고통'을 이야기한다. 신이 가해자만 용서하는 것이 아니라, 피해자의 고통 속에 가장 먼저 들어가 함께 울고 있으며, 궁극적인 심판의 때에 그 눈물을 닦아주는 '우주적 회복'이 있을 것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이 역시 현세의 피해자들에게는 공허한 약속으로 들릴 수 있다. 눈에 보이는 보상 없는 '내세의 회복'은 무책임한 위로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결국 우리가 부딪히는 벽은 이것이다. 인간의 정의는 '눈에는 눈, 이에는 이' 혹은 '완벽한 복구'를 요구하지만, 신의 자비는 그 '불가능'을 인정하고 다시 시작할 기회를 주려 한다. 돌이킬 수 없는 선택을 한 책임자들에게 신이 내미는 손길은, 그들의 잘못을 덮어주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저지른 악의 무게를 온전히 깨닫게 한 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은 삶을 어떻게 살 것인지 묻는 고통스러운 질문이다.
#생각번호20260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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