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류 뭉치 속에도 '사랑'이 깃들 수 있을까

거대해진 신앙과 관리자의 직무

by 민진성 mola mola

신앙은 관념인가, 실천인가. 이 오래된 질문 앞에서 그리스도교는 명확한 답을 내놓곤 한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라고. 지적으로 완벽한 교리를 꿰고 있고 입술로 고결한 가치를 읊조린다 해도, 그것이 손과 발을 통해 세상 밖으로 구현되지 않는다면 그 신앙은 반쪽짜리에 불과하다는 뜻이다.

그런데 나는 여기서 한 가지 의문이 생겼다. 오늘날 그리스도교는 이미 거대한 조직이 되었다. 어느 조직이나 규모가 커지면 필연적으로 시스템을 유지하기 위한 '관리직'이 생겨나기 마련이다. 현장에서 굶주린 이에게 빵을 건네고 낮은 곳에서 발을 닦아주는 실무자들과 달리, 책상 앞에 앉아 예산을 짜고 인력을 배치하며 행정 업무를 처리하는 이들의 행동에서도 우리는 '신앙적 행함'을 발견할 수 있을까? 겉으로 보기에 그들의 일과에는 직접적인 '선행'이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몸의 지체, 보이지 않는 신경계의 역할

나는 이 의문을 풀기 위해 성경이 비유하는 '몸'의 구조를 떠올려 보았다. 몸에는 눈에 보이는 손과 발이 있지만, 그 움직임을 조절하는 보이지 않는 신경계와 뇌가 존재한다. 발이 험한 길을 걸어가는 '행동'을 할 수 있는 이유는, 뇌가 그 방향을 지시하고 에너지를 배분하는 '관리'를 수행하기 때문이다.

거대해진 기독교 조직 안에서 관리자의 역할도 이와 같다. 현장의 구호 활동이 중단되지 않도록 자원을 확보하고, 누군가의 헌신이 헛되이 낭비되지 않도록 공정한 시스템을 만드는 일. 그것은 직접적인 선행처럼 보이지 않지만, 수많은 선행이 가능하도록 만드는 '기반의 영성'이다. 결국 관리라는 행위는 공동체라는 몸이 제대로 작동하게 만드는 숭고한 뒷받침이 될 수 있다.



'청지기'라는 이름의 책임감

그리스도교에는 '청지기(Steward)'라는 개념이 있다. 주인으로부터 자원을 맡아 관리하는 대리인을 뜻한다. 관리직에 있는 이들이 자신의 업무를 단순한 권력 행사가 아닌 '맡겨진 것을 올바르게 배분하는 일'로 정의한다면, 그들의 서류 작업은 곧 신앙의 실천이 된다.

정직하게 숫자를 검토하고, 효율적으로 일정을 조율하며, 조직 내의 갈등을 중재하는 일. 이 과정에서 관리자가 자신의 사익보다 공동체의 유익과 타인의 성장을 우선순위에 둔다면, 그것은 가장 치열한 형태의 '이웃 사랑'일지도 모른다. 눈에 보이는 드라마틱한 기적은 아닐지라도, 질서라는 이름의 작은 기적을 매일 일궈내고 있는 셈이니까.



관료주의라는 차가운 함정

물론 경계해야 할 지점은 분명하다. 조직이 비대해질 때 찾아오는 가장 큰 유혹은 '관료주의'다. 시스템의 유지 자체가 목적이 되는 순간, 관리는 신앙의 도구가 아니라 신앙의 걸림돌이 된다. 서류 너머에 있는 '사람'의 얼굴을 잊어버리고, 사랑이라는 본질 대신 규칙이라는 껍데기만 남을 때 관리자의 행위에서 신앙은 증발한다.

"사랑이 없으면 울리는 괭과리와 같다"는 말은 현장 실무자에게만 해당되는 말이 아니다. 오히려 권한을 가진 관리자들에게 더 서늘하게 다가오는 경고여야 한다.



결국, 행함의 본질은 '방향'에 있다

신앙에 따른 행동이란 반드시 거창한 구제 사업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고 생각한다. 내가 서 있는 위치가 현장이든, 아니면 차가운 모니터 앞이든 상관없다. 나의 에너지가 타인의 고통을 줄이고 공동체의 선을 향해 흐르고 있다면, 그 모든 과정이 곧 '믿음의 증거'가 된다.

거대 조직의 부속품처럼 느껴지는 관리 업무일지라도, 그 끝에 누군가를 향한 '사랑'이 닿아 있다면 그것은 충분히 가치 있는 신앙적 행동이다. 나는 오늘도 묻는다. 나의 관리와 나의 행정은 누구를 향하고 있는가. 그 질문에 부끄러움 없이 답할 수 있을 때, 비로소 나의 믿음은 나의 일상을 통해 살아 움직이기 시작할 것이다.




#생각번호20260121




본 글은 RE:Mind 아카이브 프로젝트의 일부입니다.

관련 기록과 개인 아카이브는 여기에서 이어집니다.

molamola.live

월, 화, 수, 목, 금, 토, 일 연재
이전 02화가르침의 박제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