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함'의 진짜 얼굴을 묻다
신앙은 관념이 아니라 실천이라는 명제 앞에서 우리는 종종 거창한 장면을 상상한다. 오지로 떠나는 선교사나 전 재산을 기부하는 자선가처럼 말이다. 하지만 오늘날 그리스도교라는 거대한 조직을 들여다보면 상황은 복잡해진다. 현장이 아닌 책상 앞에서 시스템을 굴리는 관리자들, 그리고 그 조직을 외부에서 지탱하는 수많은 사회적 기능들 사이에서 '신앙적 행함'의 경계는 모호해지기 때문이다.
어느 조직이나 규모가 커지면 필연적으로 '관리직'이 생겨난다. 이들은 직접 굶주린 이에게 빵을 건네지 않는다. 대신 예산을 짜고, 인력을 배치하며, 법적 문제를 검토한다. 누군가는 묻는다. "그들의 무미건조한 행정 업무 어디에 선행이 있느냐"고.
하지만 성경이 말하는 '몸의 비유'를 빌려오면 답은 명확해진다. 몸에는 걷는 발도 있지만, 그 발에 에너지를 보내고 방향을 지시하는 신경계가 반드시 필요하다. 관리는 공동체라는 몸이 마비되지 않도록 산소를 공급하는 작업이다. 정직하고 효율적인 행정이 없다면, 현장의 뜨거운 선행조차 금세 동력을 잃고 만다. 결국 관리란, 눈에 보이는 선행이 가능하도록 터전을 닦는 '보이지 않는 영성'이다.
여기서 질문은 한 단계 더 나아간다. "그렇다면 교회를 보호하는 경찰, 불을 끄는 소방관, 국가 시스템을 유지하는 시민들의 행위도 모두 신앙적 행함인가?"라는 의문이다. 그들이 없다면 그리스도교 조직 또한 존립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교는 이를 '일반 은총(Common Grace)'이라는 개념으로 포용한다. 신이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 모두에게 햇빛과 비를 내리듯, 세상을 안전하고 질서 있게 만드는 모든 직업적 헌신은 신의 섭리 안에 있다. 소방관이 생명을 구하고 경찰이 정의를 세우는 것은, 그들이 의식하든 않든 세상의 붕괴를 막으려는 신의 뜻에 동참하는 숭고한 행위다. 그런 의미에서 세상의 모든 선한 노동은 넓은 의미의 '행함'에 포함된다.
그렇다면 교회 안의 관리자와 교회 밖의 조력자를 가르는 차이는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동기(Motive)'에 있다. 똑같이 서류를 검토하고 똑같이 질서를 유지하더라도, 그리스도교가 말하는 진정한 '행함'은 그 행위의 뿌리가 '신에 대한 사랑'과 '이웃을 향한 사명'에 닿아 있느냐를 묻는다.
직업적 윤리에 따라 최선을 다하는 것도 훌륭한 일이지만, 신앙적 행함은 한 걸음 더 나아간다. 관리 업무를 단순한 '생계 수단'이나 '권력 행사'로 여기지 않고,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사랑이 전달되도록 통로를 만드는 과정으로 인식하는 것이다. 엑셀 시트의 숫자 하나를 옮기는 손길에 "이 자원이 낭비 없이 낮은 곳으로 흐르게 하소서"라는 기도가 담길 때, 비로소 사무(事務)는 사명(使命)이 된다.
물론 위험은 늘 존재한다. 조직이 비대해질 때 찾아오는 '관료주의'는 신앙의 가장 큰 적이다. 서류 너머에 있는 '사람'의 얼굴을 잊고 시스템의 유지 자체를 목적으로 삼는 순간, 관리자의 행위에서 신앙은 증발하고 차가운 껍데기만 남는다.
결국 중요한 것은 내가 서 있는 위치가 아니다. 사이렌을 울리며 도로를 질주하는 소방차 안이든, 형광등 아래 고요한 사무실 책상이든 상관없다. 나의 에너지가 타인의 고통을 줄이고 세상을 더 선하게 만드는 데 기여하고 있는가, 그리고 그 일을 '사랑'의 마음으로 수행하고 있는가. 그 질문에 정직하게 답할 수 있을 때, 우리의 모든 일상은 죽은 믿음을 깨우는 살아있는 행함이 될 것이다.
#생각번호20260121
본 글은 RE:Mind 아카이브 프로젝트의 일부입니다.
관련 기록과 개인 아카이브는 여기에서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