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이 더 진짜인가
우리는 흔히 아무런 조건 없이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선행을 가장 숭고하다고 믿는다. 곤경에 처한 이를 보고 왈칵 눈물을 쏟으며 손을 내미는 '인간적인 동정' 말이다. 그에 비해 "신이 사랑하라 했으니 사랑한다"는 기독교적 가르침에 따른 행위는 어딘가 부자연스럽게 느껴진다. 마치 숙제를 하듯, 혹은 천국에 가기 위한 점수를 쌓듯 움직이는 '계산적인 행동'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나 역시 오랫동안 그렇게 생각했다. 내 안의 측은지심에서 비롯된 행위가 훨씬 더 인간미 있고 '진짜'라고 말이다. 반면 신앙을 근거로 하는 행위는 나 자신의 선함이 아니라 외부에 입력된 명령에 따르는 것 같아 위선적으로 느껴지기도 했다. "내가 좋아서 돕는 것"과 "남이 시켜서 돕는 것" 중 무엇이 더 선하냐고 묻는다면, 많은 이들이 주저 없이 전자를 택할 것이다.
하지만 나는 여기서 한 가지 질문을 더 던져본다. 만약 내 마음이 차갑게 식어버린 날이라면 어떻게 될까? 내가 돕고자 하는 대상이 도저히 정이 가지 않는 사람이거나, 심지어 나에게 해를 끼친 원수라면 나의 '인간적인 동정'은 여전히 작동할 수 있을까?
인간의 애정과 동정심은 날씨와 같아서 매우 가변적이다. 내가 여유가 있고, 상대가 내 마음에 들 때만 선택적으로 발휘되는 한계가 있다. 반면 질문자가 '계산적'이라고 느꼈던 그 신앙적 행위는, 역설적으로 내 감정이 바닥났을 때 그 진가를 드러낸다.
신앙에 의한 행함은 단순히 규칙을 지키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나는 지금 저 사람을 돕고 싶지 않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을 선택하겠다"는 단단한 의지의 결단이다.
이것을 단순히 '계산적'이라고 치부하기엔 그 안에 담긴 희생이 너무나 크다. 내 안의 본능(미움, 무관심, 피로)을 거스르며 타인을 향해 한 걸음을 내딛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교가 말하는 선행은 '내가 착한 마음을 가졌음'을 증명하는 자리가 아니라, '내 마음이 차가울지라도 사랑이라는 더 큰 원리에 나를 굴복시키는' 자기 초월의 자리다.
결국 무엇이 더 선한가를 따지는 것은 '씨앗이 더 귀한가, 뿌리가 더 귀한가'를 묻는 것과 같다. 인간적인 동정이 아름다운 씨앗이라면, 신앙적 의지는 가뭄과 폭풍 속에서도 그 씨앗을 꽃피우게 만드는 뿌리와 같다.
가장 이상적인 모습은 신앙이라는 의지로 시작된 행위가 반복되어, 결국 나의 성품 자체가 따뜻한 동정심으로 완전히 변화하는 것일 테다. 의무로 시작했으나 결국 진심이 되어버리는 과정, 그 치열한 갈등 속에 신앙적 행함의 진짜 가치가 숨어있다고 나는 믿는다.
#생각번호202601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