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이 의무가 될 수 있는가

기독교적 '선'의 차가운 진실

by 민진성 mola mola

우리는 보통 '선행'이라 하면 마음속에서 뜨거운 무언가가 솟구쳐 오르는 장면을 떠올린다. 불쌍한 이를 보고 가슴이 아파서, 혹은 누군가를 너무 아껴서 하는 행동 말이다. 그런데 그리스도교의 가르침을 깊이 들여다보면 당혹스러운 지점을 마주하게 된다. 그들이 말하는 사랑과 선은 '우러나오는 마음'보다 '지켜야 할 명령'에 더 가깝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리스도교의 선은 결국 차가운 의무에 불과한 것일까?



감정을 믿지 않는 신앙

그리스도교는 인간의 감정을 그리 신뢰하지 않는다. 오늘 누군가를 향해 불타올랐던 동정심이 내일은 차가운 무관심으로 변할 수 있다는 것을 잘 알기 때문이다. 만약 선행이 오직 '우러나오는 마음'에만 달려 있다면, 우리가 기분이 좋지 않거나 상대가 밉게 느껴질 때 선행은 중단될 수밖에 없다.

그래서 그리스도교는 선을 '감정'의 영역에서 '의지'의 영역으로 옮겨 놓는다.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말은 권유가 아니라 명령이다. 즉, 마음이 내키지 않더라도 해야 하는 '의무'로 선을 규정하는 것이다.



의무이기에 가능한 보편적 선

이것이 언뜻 보기에는 계산적이고 기계적으로 보일 수 있지만, 역설적으로 이 '의무'가 선행의 범위를 무한히 확장한다. 내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선은 내가 좋아하는 사람, 내 눈에 불쌍해 보이는 사람에게만 한정된다.

하지만 '의무로서의 선'은 내 감정의 장벽을 뛰어넘는다. 내가 혐오하는 사람, 나에게 상처를 준 사람, 혹은 아무런 감정도 느껴지지 않는 낯선 이에게조차 손을 내밀게 만드는 힘은 '우러나오는 마음'이 아니라 '지켜야 할 의무'에서 나온다. 그리스도교에서 말하는 선이 '원수 사랑'까지 나아갈 수 있는 이유는 그것이 철저히 의지에 기반한 의무이기 때문이다.



의무가 진심이 되는 과정

그렇다고 해서 평생을 차가운 의무감으로만 살라는 뜻은 아니다. 신앙의 논리는 이 순서를 뒤집는다. 먼저 의무감을 가지고 선을 '행하다 보면', 그 과정에서 딱딱했던 마음이 녹고 진짜 사랑이 '우러나오게' 된다는 것이다.

마치 악기를 배우는 아이가 처음에는 억지로(의무로) 건반을 누르지만, 숙련된 뒤에는 즐거움(우러나옴)으로 연주하게 되는 것과 같다. 그리스도교에서 말하는 의무는 선한 인간으로 변모해가는 과정에서의 '훈련'인 셈이다.



진짜 선함은 어디에 있는가

결국 질문으로 돌아가 본다. 우러나와서 하는 선과 의무로 하는 선 중 무엇이 더 진짜인가?

자연스럽게 우러나오는 선은 아름답지만 위태롭다. 반면 의무로 행하는 선은 투박하지만 단단하다. 그리스도교는 우리에게 '착한 기분'에 취해 있기보다, 기분이 좋지 않은 순간에도 '선의 자리를 지키는 의무'를 다하라고 말한다. 어쩌면 가장 숭고한 선은, 사랑하고 싶은 마음이 전혀 들지 않는 순간에도 사랑하기로 결단하는 그 차가운 의무감 끝에서 피어나는 것일지도 모른다.




#생각번호20260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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