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정(矯正)으로서의 신앙
그리스도교가 말하는 '선'이 왜 그토록 의무와 명령의 형태를 띠고 있는지 파헤치다 보면, 결국 하나의 불편한 진실과 마주하게 된다. 그것은 이 종교가 인간의 본성을 기본적으로 '악하다'고, 혹은 '철저히 자기중심적'이라고 전제한다는 사실이다. 그리스도교에 있어 신앙이란 아름다운 본성을 꽃피우는 과정이 아니라, 비뚤어진 본성을 깎아내고 다시 조립하는 '교정'의 과정에 가깝다.
우리는 흔히 인간에게서 우러나오는 동정과 사랑을 믿고 싶어 한다. 하지만 그리스도교는 차갑게 묻는다. "그 선함이 얼마나 지속될 수 있는가? 네 이익과 충돌하는 순간에도 그 마음이 유지될 수 있는가?" 그리스도교의 시각에서 인간의 본성이란 놔두면 끊임없이 자기 자신만을 향해 굽어지는 성질을 가졌다. 가만히 두면 잡초가 자라는 정원처럼, 인간의 마음도 가만히 두면 이기심과 편견으로 가득 차게 된다는 전제다.
그렇기에 그리스도교는 '마음 가는 대로 살라'고 말하지 않는다. 오히려 본성을 거슬러 살라고 명령한다. 원수를 사랑하고, 나보다 남을 낫게 여기라는 가르침은 인간의 자연스러운 본능(복수심, 우월감)과는 정반대 방향을 가리킨다.
이 지점에서 '인위적이고 계산적인' 느낌의 실체가 드러난다. 그것은 일종의 교정 장치이기 때문이다. 굽어 있는 뼈를 바로잡기 위해 딱딱한 부목을 대듯, 이기적인 본성을 바로잡기 위해 '사랑'과 '희생'이라는 단단한 교리를 들이대는 것이다. 당연히 아프고, 부자연스러우며, 의무적일 수밖에 없다.
하지만 이 시스템의 목적은 단순히 인간을 억압하는 데 있지 않다. 그리스도교는 반복된 교정을 통해 인간의 본성 자체가 재구조화될 수 있다고 믿는다.
처음에는 의무감으로, 억지로, 명령에 따라 행하던 선이 오랜 시간 훈련을 거치면 마치 원래 그랬던 것처럼 자연스러운 나의 일부가 된다는 논리다. 부자연스러운 교정 기구를 오래 차고 있은 뒤에 비로소 바른 자세로 걸을 수 있게 되는 것과 같다. 이들이 말하는 '성화(Sanctification)'란 결국 악한 본성이 신앙이라는 틀에 의해 서서히 교정되어, 마침내 신의 성품을 닮은 새로운 본성으로 거듭나는 과정을 의미한다.
결국 그리스도교가 이토록 강한 교리를 동원하는 이유는 인간을 스스로 구제 불능인 존재로 보기 때문이다. 밖에서 강하게 잡아주는 '명령'과 '의무'가 없다면, 인간은 결코 자기중심성이라는 중력에서 벗어날 수 없다고 보는 것이다.
따라서 그리스도교에서 말하는 선행이 우러나오는 감정보다 의무를 강조하는 이유는 명확하다. 인간의 감정은 믿을 수 없을 만큼 부패하기 쉽지만, 외부에 세워진 명령의 푯대는 변하지 않기 때문이다. 신앙이란 결국, 나라는 불안정한 존재를 신이라는 견고한 기준에 맞춰 끊임없이 교정해 나가는 치열한 투쟁의 기록인 셈이다.
#생각번호20260121
본 글은 RE:Mind 아카이브 프로젝트의 일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