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8] 행복이라는 고산병

안헤도니아를 대하는 리스크 관리자의 자세

by 민진성 mola mola

어떤 이들에게 '안헤도니아'는 행복의 정점에서 느끼는 현기증이자, 상실이 두려워 스스로를 마취시키는 비극적인 자기방어 기제다. 소설 속 묘사처럼 행복을 잃을지도 모른다는 공포 때문에 감정을 닫아버리는 것은, 분명 고산병처럼 고통스러운 일이다. 하지만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보자. 과연 그 공포는 떨쳐내야만 하는 병적인 증상일까, 아니면 다가올 추락을 대비하라는 본능의 날카로운 신호일까.



고점에서 리스크를 점검하는 본능

냉정하게 말해, 리스크 대비는 고점일 때 하는 것이 옳다. 자산 가치가 정점일 때 포트폴리오를 분산하고, 날씨가 가장 좋을 때 폭풍우에 대비해 지붕을 고치는 것이 진정한 전략가다.

우리가 행복의 한복판에서 느끼는 막연한 불안, 즉 '안헤도니아'의 징후들은 어쩌면 우리 내면의 리스크 관리자가 보내는 경고등일지도 모른다. "지금 이 행복이 영원할 거라는 착각에 빠져 안전장치를 푸는 순간, 하산길은 비극이 될 것이다"라는 준엄한 경고 말이다.



감상적인 회피 vs 전략적인 대비

안헤도니아에 잠식된 사람은 행복을 '느끼지 않는' 방식으로 도망친다. 이것은 비겁한 회피다. 하지만 진정한 생존자는 그 불안을 동력으로 삼아 '대비'한다.

행복해서 불행하다는 역설적인 감정이 들 때,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감정의 문을 닫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지금 누리는 행복의 원천이 무엇인지 분석하고, 그것이 사라졌을 때 나를 지탱해 줄 '플랜 B'를 설계하는 것이다. 고산병이 두렵다면 산에 오르지 않는 것이 아니라, 산소통을 챙기고 체력을 안배하며 올라가는 것과 같은 이치다.



결핍을 예비하는 '유비무환'의 행복

결국 안헤도니아라는 병적 묘사 너머에는, '가역적인 삶'에 대한 통찰이 숨어 있다. 우리는 언제든 다시 공집합의 상태로 돌아갈 수 있는 존재들이다.

행복의 정점에서 느끼는 서늘한 기운을 무시하지 말자. 대신 그 기운을 빌려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져야 한다. "이 기쁨이 사라진 자리에서 나는 무엇으로 다시 일어설 것인가?" 이 질문에 답을 가진 사람에게 안헤도니아는 더 이상 병이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가장 행복한 순간에도 나를 잃지 않게 만드는 가장 강력한 정신적 안전벨트가 된다.



가장 안전한 행복의 높이

진정한 평온은 행복을 잃지 않으려 애쓰는 데서 오지 않는다. 행복을 잃어도 내가 무너지지 않을 것이라는 '대비'에서 온다.

이제 안헤도니아를 '행복을 누리지 못하는 장애'로만 보지 말자. 그것은 추락의 공포를 생존의 지혜로 치환하려는 인간의 본능적인 시도다. 고점에서 리스크를 점검하는 자만이, 다시 평지로 내려왔을 때도 다치지 않고 다음 산을 향해 걸어갈 수 있다.





#생각번호20260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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