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두가 잘살면 지구는 깨끗해질까

환경이 감춘 '가난'의 얼굴

by 민진성 mola mola

환경 오염을 해결하기 위한 수많은 대책 중 단골로 등장하는 주장이 있다. 바로 "가난을 뿌리 뽑아야 환경이 개선된다"는 논리다. 당장 먹고살기 힘든 이들에게 환경 보호를 강요할 수 없으니, 우선 경제적 여유를 만들어 쾌적한 환경을 가꾸게 하자는 취지다. 얼핏 들으면 무척이나 인도적이고 합리적인 말처럼 들린다.

하지만 나는 이 지점에서 한 가지 근본적인 의구심이 들었다. 정말 가난이 사라지면 오염도 사라질까? 우리가 누리는 부의 부산물은 반드시 어딘가로 흘러가야만 하는데, 그 오염을 처리할 부지와 노동을 제공하는 쪽은 결국 다시 '상대적 약자'가 되지 않겠느냐는 의문이다.



사라지지 않는 부산물, 밀려나는 사람들

우리는 흔히 선진국의 깨끗한 거리와 잘 가꿔진 공원을 보며 '경제 발전이 환경을 살렸다'고 믿는다. 그러나 그 깨끗함의 이면에는 '오염의 수출'이라는 불편한 진실이 숨어 있다. 고소득 국가가 누리는 쾌적함은 상당 부분 공해를 유발하는 공장을 개발도상국으로 이전하거나, 막대한 쓰레기를 국경 너머로 밀어낸 결과물이다.

경제학에는 소득이 높아질수록 환경 파괴가 줄어든다는 '환경 쿠즈네츠 곡선'이 존재하지만, 이는 지구라는 전체 시스템을 놓고 보면 일종의 착시 현상에 가깝다.

$$y = f(x)$$

위 식에서 $x$인 소득이 높아질 때 $y$인 오염도가 낮아지는 것처럼 보이는 이유는, 단지 오염의 발생지가 이동했을 뿐 총량이 사라진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내가 사는 동네를 깨끗하게 유지하기 위해 누군가의 뒷마당(NIMBY)을 희생시켜야 한다면, 그 희생양은 언제나 경제적 협상력이 낮은 쪽의 몫이 된다.



가난은 상대적이고, 오염은 물리적이다

가장 본질적인 문제는 '가난'이 상대적인 개념이라는 점이다. 설령 전 지구적인 빈곤이 퇴치되어 모두가 일정 수준 이상의 삶을 영위하게 된다고 가정해 보자. 그때가 되면 아무도 위험하고 고된 환경 정화 노동을 하려 하지 않을 것이며, 혐오 시설이 들어서는 것을 용납하지 않을 것이다.

결국 사회는 다시 줄을 세우게 된다. '더 부유한 곳'과 '덜 부유한 곳'. 그리고 오염은 다시 물길을 따라 낮은 곳으로 흐르듯, 상대적으로 소득이 낮은 지역으로 스며들 것이다. 자본주의 체제 아래에서 오염 처리 부지를 결정하는 기준은 결국 '보상 비용'의 크기이기 때문이다.



'누가 치울 것인가'에서 '무엇을 남길 것인가'로

결국 "가난을 없애면 환경이 좋아진다"는 주장은 환경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오염의 종착지를 잠시 변경하는 임시방편일지도 모른다.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가난의 박멸이 아니라 '부의 구조' 그 자체다.

환경 오염은 가난의 결과물이 아니라, 우리가 선택한 생산과 소비 방식의 그림자다. 누군가에게 처리 비용을 전가할 수 있다는 오만한 믿음이 존재하는 한, 빈곤의 유무와 관계없이 오염은 계속될 것이다.

이제 질문의 방향을 바꿔야 한다. "이 쓰레기를 누가, 어디에서 처리할 것인가"가 아니라, "어떻게 하면 애초에 누군가의 희생을 전제로 한 부산물을 만들지 않을 것인가"로 말이다. 가난이라는 이름 뒤에 오염을 숨겨두는 비겁한 대물림은 이제 멈춰야 한다.





#생각번호20260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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