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이상주의적 주장에 대한 냉소
"가난을 해결하면 환경 문제도 해결된다." 이 얼마나 달콤하고 매혹적인 말인가. 가난한 이들에게는 부를, 지구에게는 회생을 약속하는 이 논리는 언뜻 완벽한 윈-윈(Win-Win) 전략처럼 보인다. 하지만 나는 이 문장을 마주할 때마다 형용할 수 없는 위화감을 느낀다. 이건 정말 순수한 믿음일까, 아니면 본질을 외면하려는 영악한 계산일까.
이런 주장이 가능한 이유는 기본적으로 '성장'이라는 만능 치트키를 포기하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정치인과 경제학자들에게 "지금 당장 소비를 줄이고 성장을 멈춰야 한다"는 말은 금기나 다름없다. 대신 그들은 "일단 더 성장해서 부유해지자, 그러면 그 돈과 기술로 환경을 고칠 수 있다"는 낙관론을 판다.
이는 불편한 현재의 규제를 미래의 기술 혁신으로 미루는 아주 세련된 방식의 책임 회피다. 하지만 그들이 말하는 '마법 같은 기술'이 등장한다 한들, 오염을 처리할 물리적인 에너지와 그 시설이 들어설 땅의 문제는 여전히 남는다. 결국 문제는 다시 원점으로 돌아온다. "그래서 그 시설을 누구의 집 앞마당에 둘 것인가?"
가난은 절대적인 결핍이기도 하지만, 본질적으로는 '상대적 격차'다. 설령 전 지구적으로 극심한 빈곤이 사라진다고 해도, 사회 안에는 언제나 상대적인 상층과 하층이 존재하기 마련이다. 내가 부의 부산물인 쓰레기와 오염을 감당하지 않아도 되는 권력을 가졌다면, 그 오염은 반드시 나보다 힘이 약하고 경제적 여력이 없는 곳으로 흘러간다.
결국 "가난을 없애면 환경이 좋아진다"는 말은 오염의 종착지를 잠시 보이지 않는 곳으로 옮겨두자는 말과 다르지 않다. 부유한 국가가 깨끗한 공기를 누리는 이유가 단순히 소득이 높아서가 아니라, 오염 물질을 배출하는 공장을 소득이 낮은 국가로 밀어냈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이미 알고 있지 않은가. 가난을 뿌리 뽑는다고 해서 이 '전가(傳嫁)의 법칙'이 사라지지는 않는다.
물론 당장 굶주린 이들이 생존을 위해 숲을 태우는 '생존형 오염'은 가난을 해결함으로써 막을 수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지구를 더 거대하게 파괴하는 것은 그들의 생존이 아니라, 부유한 이들의 끝없는 '과잉 소비'다. 가난을 해결해 모두를 중산층으로 만든다는 것은, 역설적으로 더 많은 사람이 더 많이 소비하고 더 많은 부산물을 남기는 구조를 견고히 하는 일일지도 모른다.
나는 "가난만 없애면 다 해결된다"는 주장에서 일종의 집단적 기만을 본다. 우리가 누리는 쾌적함이 누군가의 '상대적 빈곤'을 담보로 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싶지 않은 마음 말이다.
환경 문제는 가난이라는 변수를 제거한다고 해결되는 고차 방정식이 아니다. 오히려 우리가 누리는 부의 방식 자체가 누군가에게 오염을 떠넘겨야만 유지되는 구조는 아닌지, 그 근본적인 거울을 직시해야 할 때다. 가난을 해결하자는 선의가 오염에 대한 면죄부가 되어서는 안 된다.
#생각번호202602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