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보라는 이름의 상실

예술가는 무엇을 지불하고 나아가는가

by 민진성 mola mola

어떠한 방향으로의 전진은 반드시 반대 급부의 후퇴를 동반한다. 경제학에서는 이를 '기회비용'이라 부르고, 공학에서는 '트레이드오프'라 말한다. 나는 오늘 이 차갑고 명징한 법칙을 예술이라는 지극히 주관적인 영역에 대입해 보려 한다.



얻는 것이 있다면 잃는 것이 있다

예술가가 자신만의 고유한 세계를 구축하기 위해 '다름'을 선택할 때, 그는 필연적으로 진보의 길에 들어선다. 어제보다 더 정교해진 기법, 혹은 이전에 없던 파격적인 시선은 분명 예술가 개인에게는 눈부신 주관적 진보일 것이다. 하지만 나는 여기서 질문을 던지게 된다. 그 주관적 진보의 발걸음이 정말 '객관적 예술 가치'의 총량을 키우고 있는 것일까?

역사를 돌이켜보면 예술의 진보는 쌓아 올리는 '축적'이라기보다, 무언가를 내어주고 다른 것을 취하는 '교환'에 가까웠다. 인상주의자들이 빛의 찰나를 포착하는 법을 깨달았을 때, 인류는 수백 년간 다듬어온 정교한 형태미와 서사적 엄밀함을 잃어야 했다. 추상화가 본질적인 선과 면의 역동성을 획득했을 때, 우리는 캔버스 위에서 위로받던 구체적인 대상과 재현의 안락함을 포기해야만 했다.



주관적 전진과 객관적 가치의 평행선

나에게 예술적 진보란 결코 우상향하는 그래프가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거대한 가치의 바다 위에서 무게중심을 옮기는 항해와 같다.

예술가가 독창성이라는 주관적 가치를 극단으로 밀어붙일 때, 아이러니하게도 그 작품이 가졌던 '보편적 공감'이라는 객관적 가치는 희생되기 쉽다. 작가의 세계가 깊어질수록 대중과의 거리는 멀어지고, 기법이 전위적일수록 고전적인 안정감은 파괴된다.

결국 예술적 가치의 증가라는 것은 객관적인 수치로 증명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어떤 시대에 우리가 '진보'라고 믿었던 것이, 훗날 돌아보면 그저 소중한 무언가를 상실하며 얻어낸 '다른 상태'일 뿐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기 때문이다.



창조적 파괴자로서의 예술가

그래서 나는 예술가를 '창조적 파괴자'라고 부르고 싶다. 그들은 새로운 아름다움을 발명하기 위해 기존의 아름다움을 기꺼이 파괴한다.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가치의 총량을 늘리는 효율성이 아니다. 지금 이 순간, 내가 선택한 이 '다름'이 이전에 보지 못한 지평을 열어줄 수 있는가 하는 존재론적 질문이다.

주관적 진보가 객관적 가치의 하락을 동반할 수 있다는 사실은 예술가에게는 일종의 형벌이자 축복이다. 완벽한 진보란 존재하지 않음을 인정할 때, 비로소 예술가는 '더 나은 것'을 만들어야 한다는 강박에서 벗어나 '오직 나만이 할 수 있는 것'에 집중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오늘도 수많은 예술가가 캔버스 앞에 선다. 그들이 내딛는 한 걸음이 무언가를 잃어가는 과정일지라도, 그 손실 끝에 피어날 단 하나의 '다름'을 위해 그들은 기꺼이 진보라는 이름의 상실을 선택한다.





#생각번호20260203

월, 화, 수, 목, 금, 토, 일 연재
이전 11화가시화된 결핍의 미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