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향이 아닌 밀도에 대하여
예술적 진보가 필연적으로 다른 가치의 손실을 수반한다면, 우리는 여기서 거대한 논리적 모순에 직면한다. 가치의 방향이 정해져 있지 않고 저마다의 전진이 누군가에게는 퇴보라면, 도대체 ‘예술성이 높다’는 평가는 어떻게 성립할 수 있는가? 가치가 사방으로 흩어져 있다면, 우리는 무엇을 기준으로 ‘더 나음’을 이야기하는가.
나는 이 혼란스러운 지점에서 예술성을 새롭게 정의해야 한다고 믿는다. 예술성은 목적지에 도달한 '성취'가 아니라, 그 방향이 어디든 끝까지 밀어붙인 ‘응축된 에너지의 밀도’라고 말이다.
우리는 흔히 가치를 ‘어디로 가느냐’를 결정하는 벡터(Vector)로 파악하곤 한다. 하지만 예술의 영역에서 가치의 방향은 무한하며, 절대적인 북극점은 존재하지 않는다. 누군가는 극도의 사실주의로 향하고, 누군가는 완전한 추상으로 나아간다. 이때 두 사람의 예술성을 비교하는 것은 불가능해 보인다.
그러나 나는 여기서 '텐션(Tension)'이라는 개념을 가져오려 한다. 예술성이란 예술가가 자신이 선택한 그 방향을 향해, 기존의 안락한 가치들을 얼마나 치열하게 희생시키며 밀어붙였는가 하는 긴장감의 크기다. 100미터를 동쪽으로 달린 사람과 서쪽으로 달린 사람의 위치는 반대지만, 그들이 흘린 땀의 양과 근육의 팽창도는 동일한 가치를 지니는 것과 같다.
따라서 "예술성이 있다"는 말은 "남들보다 더 옳은 방향으로 갔다"는 뜻이 아니다. 그것은 "자신이 설정한 그 좌표계에서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고유한 깊이에 도달했다"는 승인이다.
가치의 방향이 분명하지 않다는 사실과 예술성이 존재한다는 사실은 여기서 공존한다. 가치의 방향은 수평적으로 넓게 펼쳐져 있어 자유롭지만(상대성), 그 선택한 길에서 확보한 고유성의 깊이는 수직적으로 측정될 수 있기 때문이다(절대성).
우리가 대가들의 작품에서 느끼는 압도적인 예술성은 그들이 선택한 '방향'의 옳음에서 오는 것이 아니다. 그 방향을 위해 다른 모든 가능성을 기꺼이 소거해버린, 그 선명하고도 고집스러운 선택의 밀도에서 오는 것이다.
예술가라는 존재는 저마다 다른 방향을 가리키는 나침반과 같다. 세상에 수만 개의 나침반이 있다면, 그 바늘이 가리키는 방향은 제각각일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어떤 나침반이 더 훌륭한지 알 수 있다. 외부의 흔들림에 굴하지 않고, 자신이 믿는 단 하나의 방향을 향해 얼마나 예민하고 강하게 떨리고 있는지를 보면 된다.
결국 예술성이란 '무엇을 얻었는가'의 문제가 아니라 '무엇을 위해 무엇을 버렸는가'를 증명하는 과정이다. 방향의 우열이 사라진 혼돈의 시대에서, 예술가는 오직 자신의 선택을 끝까지 책임지는 그 밀도만으로 자신의 가치를 증명해낸다.
나에게 예술성이란 나아가는 '방향'이 아니라, 그 길을 뚫고 나가는 '기세' 그 자체다.
#생각번호202602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