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창조적 파괴자의 변명
“미술(Art)이라는 것은 사실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미술가(Artist)들이 있을 뿐이다.”
에른스트 곰브리치의 이 도발적인 문장은 오랫동안 내 마음속을 떠돌았다. 만약 ‘미술’이라는 절대적인 실체나 도달해야 할 고정된 북극점이 없다면, 우리가 그토록 열망하는 ‘예술적 진보’란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나는 이 질문의 답을 찾기 위해 ‘상실’과 ‘밀도’라는 두 가지 키워드를 통과해야만 했다.
우리는 흔히 예술이 더 나은 방향으로 전진한다고 믿는다. 하지만 엄밀히 말해 예술의 진보는 무언가를 쌓아 올리는 축적이 아니라, 어떤 가치를 취하기 위해 다른 가치를 지불하는 ‘교환’이다.
내가 고유한 ‘다름’을 선택하는 순간, 나는 그 대가로 보편적인 공감이나 기존의 질서를 상실한다. 주관적인 진보가 객관적인 가치의 하락을 수반하는 이 역설적인 상황에서, 만약 ‘미술’이라는 거대한 목적지가 정해져 있었다면 이 모든 발걸음은 비효율적인 방황에 불과했을 것이다.
그러나 곰브리치의 말대로 미술이라는 실체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정해진 목적지가 없기에 예술가에게는 ‘옳은 방향’이 아니라 ‘자신만의 선택’만이 남는다. 예술가는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가는 등반가가 아니라, 아무것도 없는 황무지에 자신만의 좌표를 찍는 개척자가 되는 것이다.
여기서 한 가지 의문이 고개를 든다. 가치의 방향이 사방으로 열려 있다면, 우리는 무엇을 근거로 ‘예술성이 높다’고 말하는가? 나는 그것이 ‘어디로 갔는가’가 아니라, 그 방향을 향해 ‘얼마나 치열하게 밀어붙였는가’에 달려 있다고 생각한다.
예술성은 목적지에 도달한 성취도가 아니라, 자신이 선택한 그 좁은 길을 위해 다른 모든 가능성을 기꺼이 소거해버린 에너지의 밀도다. 미술은 존재하지 않지만 미술가들이 실재한다는 말은, 예술의 가치가 추상적인 규범이 아니라 예술가의 구체적인 ‘태도’와 ‘투쟁’ 속에서만 태어난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객관적 가치의 증가에 연연하지 않고, 주관적 진보를 위해 기꺼이 상실을 감내하는 그 고집스러운 선택의 궤적. 그것이 바로 우리가 대가의 작품에서 발견하는 압도적인 ‘예술성’의 정체다.
결국 미술가로 산다는 것은 매일 아침 ‘미술’이라는 허상을 부수고, ‘나’라는 실재를 세우는 일이다. 타인이 세워둔 객관적 가치의 기준에 나의 진보를 맞추려 할 때 예술은 박제가 된다. 반대로, 내가 선택한 ‘다름’이 가져올 손실을 두려워하지 않고 그 방향으로 나의 온 생을 밀어 넣을 때, 비로소 존재하지 않던 미술은 나의 손끝에서 잠시 형상을 입는다.
미술은 없다. 그러므로 나는 자유롭다. 내가 내딛는 주관적인 한 걸음이 누군가에게는 퇴보로 보일지라도, 나는 그 상실의 끝에서 오직 나만이 가리킬 수 있는 선명한 밀도를 향해 나아갈 뿐이다.
나의 상실이 곧 나의 진보가 되는 곳, 그곳이 바로 미술가들이 살아가는 유일한 세계다.
#생각번호202602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