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명이라는 거대한 약속
흔히 과학은 객관적인 사실의 탑이라고들 말한다. 의심할 여지 없는 진실을 한 층씩 쌓아 올려 만든 견고한 성벽이라고. 하지만 나는 그 성벽의 가장 밑바닥, 즉 '공리(Axiom)'라 불리는 초석을 가만히 들여다본다. 그리고 깨닫는다. 그곳에 놓인 것은 발견된 진실이 아니라, 우리가 진실이라고 믿기로 한 '약속'이었음을.
문명은 사실 현실 그 자체보다 '우리가 무엇을 진실이라고 믿는가'에 더 큰 빚을 지고 있다. 화폐를 생각해보자. 내 지갑 속 지폐 한 장이 가치 있다는 물리적 증거는 어디에도 없다. 하지만 우리 모두가 그것에 가치가 있다는 공리에 합의하는 순간, 그것은 세상을 움직이는 에너지가 된다.
과학 역시 마찬가지다. 우리는 내일도 중력 가속도가 동일할 것이라고, 빛의 속도는 변하지 않을 것이라고 믿는다. 엄밀히 말해 미래는 가보지 않았기에 알 수 없지만, 우리는 그 믿음을 '공리'라는 이름으로 고정시킨다. 문명은 이 불안한 불확실성 위에 "그렇다 치자"라는 대담한 가정을 던짐으로써 비로소 시작되었다.
그렇다면 왜 우리는 증명할 수 없는 것을 믿는가? 답은 '유용성'에 있다. 뉴턴의 법칙이 우주의 절대적인 진리가 아님이 밝혀졌어도 우리는 여전히 그것을 사용해 다리를 짓고 로켓을 쏜다. 그것이 진실이어서가 아니라, 우리가 원하는 결과를 만들어내는 데 충분히 '유용'하기 때문이다.
결국 문명이란 진리를 찾아가는 구도자의 길이 아니라, 혼돈(Chaos) 속에서 인간이 살아가기 위해 질서(Cosmos)를 부여하는 과정이다. 우리는 우주의 본질을 꿰뚫어 본 것이 아니라,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방식으로 우주의 외곽에 선을 긋고 '조건'을 제시해온 것이다. 마치 수학의 조건제시법이 그 안에 담길 원소들을 미리 규정하듯 말이다.
우리가 쌓아 올린 과학 기술과 사회 시스템은 어쩌면 거대한 '약속의 그물'일지도 모른다. 이 그물은 연약한 경험과 귀납이라는 재료로 짜였지만, 인류 전체가 그것을 붙잡고 있는 한 그 어떤 실체보다 강력한 힘을 발휘한다.
나는 이제 깨닫는다. 우리가 발을 딛고 서 있는 이 단단한 문명은 사실 '믿음'이라는 보이지 않는 실로 꿰매어져 있다는 것을. 진실 그 자체는 저 멀리 파도치고 있을지라도, 우리가 "이것이 기준이다"라고 선언하는 순간 그 혼돈은 비로소 의미를 가진 집합이 된다. 우리는 진실을 발견한 것이 아니라, 살아가기 위해 필요한 진실을 스스로 정의하며 여기까지 온 것이다.
#생각번호202602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