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속의 세계

우리가 조건제시법을 믿어도 되는 이유

by 민진성 mola mola

수업 시간, 칠판 위에 정갈하게 적힌 집합을 본다. 원소나열법이 주는 명쾌함보다는 조건제시법이 주는 그 모호한 '기준'에 마음이 머문다. 수학자들은 흔히 원소나열법을 선호한다고들 한다. 눈앞에 펼쳐진 원소들이야말로 논란의 여지 없는 명확한 실체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문득 근원적인 의문이 들었다. 애초에 그 '조건'이라는 기준 자체가 성립할 수 있는 것인가?



경험이라는 모래성 위에 세운 공리

우리가 수학의 절대 진리라고 믿는 '공리'들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결국 그것들은 인류의 누적된 경험에서 기인했다. 사과 두 개에 하나를 더하면 세 개가 된다는 사실을 수만 번 반복하며 우리는 그것을 법칙으로 받아들였다.

하지만 철학자 흄이 지적했듯, 귀납적 경험은 미래를 보장하지 않는다. 지금까지 해가 동쪽에서 떴다고 해서 내일도 그러리라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다. 단지 '그럴 것이라 가정'할 뿐이다. 만약 우리가 공리라고 믿는 것들이 내일 당장 무너진다면, 그 공리에 기반해 세워진 '조건제시법'의 필터는 순식간에 고장 난 기계가 되어버리는 것이 아닐까?



수학, 예언이 아닌 '선언'의 미학

나는 이 혼란의 끝에서 수학이 가진 독특한 성질을 다시금 발견한다. 수학은 현실을 뒤쫓는 '관찰기'가 아니라, 스스로 세계를 창조하는 '설계도'라는 점이다.

수학에서 "짝수의 집합"이라는 조건을 제시할 때, 나는 미래에 발견될 어떤 숫자가 짝수일지 아닐지 예언하지 않는다. 대신 나는 '2로 나누어떨어지는 성질을 가진 것만을 짝수라 부르겠다'고 선언한다. 여기서 조건제시법은 경험적 관찰의 대상이 아니라, 내가 만든 세계의 입국 심사대와 같다.

미래에 어떤 기이한 숫자가 나타나더라도 상관없다. 그 숫자가 나의 심사 기준을 통과하면 내 집합의 원소가 되는 것이고, 아니면 탈락이다. 조건제시법이 성립하는 이유는 그것이 미래를 예측해서가 아니라, 미래에 무엇이 오든 변치 않을 '나만의 잣대'를 미리 못 박아두었기 때문이다.



불안한 미래를 견디는 논리의 힘

엄밀히 따지면 세상 모든 구분 기준은 위태롭다. 우리가 '사랑'이라 부르는 조건, '정의'라 부르는 기준들은 시대와 경험에 따라 파도처럼 흔들린다. 하지만 수학의 세계에서만큼은, 우리는 경험의 불확실성을 잠시 내려놓기로 약속했다.

"만약 이 조건이 영원히 변치 않는다면"이라는 거대한 가정 위에 세워진 집합의 세계. 그 안에서 조건제시법은 가장 견고한 성벽이 된다. 우리가 미래를 알 수 없기에, 오히려 어떤 미래가 와도 흔들리지 않을 '약속'을 만든 것이다. 그것이 비록 인간의 경험에서 출발했을지언정, 그 약속을 지켜내는 순간만큼은 수학은 경험을 넘어선 영원의 영역을 건드린다.





#생각번호20260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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