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의는 어떻게 거래되는가
세상은 흔히 선의와 이기심을 대척점에 둔다. 하지만 조금만 냉정하게 파고들면, 우리가 '성자'라 부르는 이들의 행위조차 정교한 손익계산서의 결과물임을 알 수 있다. 타인을 돕는 행위가 나에게 주는 심리적 포만감, 즉 '자기만족'이 그에 들어가는 시간과 자본이라는 비용보다 크다면 그것은 명백히 남는 장사다. 결국 모든 선택이 경제학의 영역이라면, 우리가 말하는 도덕은 이기심이 이타주의라는 가면을 쓰고 벌이는 고도의 심리적 거래에 불과하다.
금전적 이익만이 이윤의 전부는 아니다. 인간에게는 '자아존중감'이나 '사회적 평판' 같은 보이지 않는 화폐가 존재한다. 누군가 추운 겨울 노숙인에게 외투를 벗어주는 행위는, 외투라는 물리적 자산을 지불하고 '나 자신이 괜찮은 사람이라는 확신'이라는 고가의 심리적 재화를 구매한 것이다. 이 관점에서 보면 세상의 모든 선행은 각자의 효용 함수가 도달한 최적의 균형점이다. 선행이 부족한 사회는 사람들이 도덕적이지 않아서가 아니라, 선행이라는 상품의 가격(비용)이 너무 높거나 그로 인해 얻는 심리적 배당(이익)이 너무 낮기 때문에 발생한다.
그렇다면 인간은 생각보다 훨씬 단순한 존재일지도 모른다. 우리가 더 나은 세상을 원한다면 막연한 양심에 호소할 것이 아니라, '착한 일을 했을 때 얻는 자기만족'의 가성비를 높여주면 된다. 선행에 따르는 물리적 비용을 낮추고, 심리적 보상을 극대화하는 시스템을 설계하는 것. 이것은 윤리학의 과제가 아니라 공학의 영역이다. 타인의 고통에 공감할 때 뇌에서 분비되는 옥시토신이나 도파민의 수치를 조절할 수 있다면, 우리는 아주 적은 비용으로 대량의 '선의'를 생산해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
결국 우리가 마주하는 모든 고귀함은 '나를 기분 좋게 만들기 위한' 효율적인 선택의 결과물이다. 이러한 시선은 삶을 허무하게 만들기도 하지만, 동시에 명료하게 만든다. 하지만 여전히 질문은 남는다. 왜 인간이라는 종은 타인을 도울 때 만족을 느끼도록 설계되었는가. 그 기원이 진화의 생존 전략이든 사회적 세뇌의 결과든, 인간이 '자기만족'이라는 보상 기제에 지배받는 단순한 존재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우리는 모두 각자의 계산기를 두드리며 사랑하고, 희생하며, 용서한다. 그 계산서의 끝에 '자기만족'이라는 이윤이 남는 한, 인간의 선행은 멈추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야말로 이 냉혹한 경제학적 세계가 무너지지 않고 유지되는 가장 비겁하고도 견고한 동력일지 모른다.
#생각번호202602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