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택의 형이상학
인생은 선택의 연속이라는 진부한 격언은 경제학의 문법을 빌리는 순간 서늘한 통찰로 변한다. 경제학적 관점에서 인간은 매 순간 '기회비용'이라는 그림자를 끌고 다니는 존재다. 내가 지금 이 글을 쓰는 행위는, 동시에 내가 이 시간에 할 수 있었던 독서나 수면, 혹은 경제적 부가가치를 창출할 다른 노동을 폐기 처분한 결과다. 이쯤 되면 의문이 생길 수밖에 없다. 우리 삶에 경제가 아닌 영역이 과연 존재하는가.
현대 사회에서 인간의 실존적 고민은 대부분 경제학의 영토 안에 귀속되어 있다. 경제학의 핵심 동력은 돈이 아니라 '희소성'이기 때문이다. 시간, 감정, 육체적 에너지처럼 유한한 자원을 배분하는 모든 과정은 필연적으로 선택과 포기를 수반한다. 누군가를 사랑하는 일조차 나의 감정 자본과 시간을 특정 대상에게 집중 투여하는 결정이라는 점에서, 기회비용의 논리는 집요하게 작동한다. 이른바 '경제학의 제국주의'는 단순히 학문의 확장을 넘어 인간의 삶 자체를 하나의 거대한 거래소로 정의해 버렸다.
그렇다면 우리는 경제학의 손바닥 안에서 춤추는 광대에 불과한 걸까. 모든 것이 경제적 선택이라면 삶은 지나치게 건조하고 기능적인 것으로 전락하고 만다. 하지만 여기서 중요한 지점이 발생한다. 경제학은 선택의 '과정'을 설명할 순 있어도, 선택의 '동기'를 완벽히 해부하진 못한다. 효율성과 이익이라는 잣대로는 설명되지 않는 잉여의 지점들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기회비용이 압도적으로 높음을 인지하면서도 기꺼이 손해를 감수하는 숭고함, 합리적 계산으로는 도저히 도출될 수 없는 비이성적인 헌신이 그렇다. 경제학의 렌즈는 매끄러운 수치만을 포착하지만, 삶의 진실은 대개 그 렌즈가 초점을 잡지 못하는 거친 입자들 속에 숨어 있다.
우리의 삶에 경제가 아닌 영역은 없을지도 모른다. 모든 행위에는 대가가 따르고, 무언가를 얻기 위해 다른 무엇을 버려야 한다는 기회비용의 법칙은 물리 법칙만큼이나 견고하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그 경제적 굴레를 자각할 때 인간의 존엄은 시작된다. 내가 무엇을 포기하는지 명확히 알면서도, 그 기회비용을 압도할 만큼 가치 있다고 믿는 무언가를 선택할 때, 비로소 인간은 단순한 '합리적 행위자'를 넘어 '가치의 창조자'가 된다. 삶이 경제의 영역일지언정, 그 경제적 선택에 어떤 이름을 붙일지는 오로지 개인의 몫으로 남는다.
#생각번호20260203